"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혀서" “ 미장원집 여자 있잖아. 그 여자는 아직도 생리를 한다잖아.” “나는 벌써 끝났어. 그 귀찮은 것 아직도 하면 어떡혀. 차라리 안하는 게 뱃속 편하지. 그나저나 이놈의 다리만 안아파도 살겄네. 나이 들면 다 그렇다지만 아니 왜 벌써부터 이렇게 아픈지 몰라” “연골퇴행성 관절염이지. 그건 자기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관절연골이 퇴행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사용해서 오는 노화현상이야. 어떤 사람들은 과체중으로 관절과 연골에 무리한 힘을 줘서 그런 경우도 있다고 그러더라” “어찌보면 아플때도 됐지. 내년이면 육십인데 그 오랜 세월동안 움직여서 먹고 살았으니 몸도 피곤할만 할거여. 에구, 이젠 영락없는 노인네 이네” “어머머, 누가 목장댁 보고 노인네라고 해. 피부는 아직도 30대 같은데. 보약이라도 한재 달여 먹고 힘내. 인생 뭐 있어. 새끼도 중요하고 신랑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나 자신이라구. 병들어 죽으면 나만 불쌍한 거야. 목장댁도 이젠 자신한테 좀 투자하고 살아 애들 다 커서 장가갔는데 뭘 그리 억척같이 살려고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읍네에서 시장을 보고 수퍼댁과 수다를 떨다보니 나이 들어가는 얘기가 나오고 무릅 관절 얘기까지 나온 것이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사실 수퍼댁 말이 맞긴 맞는 것 같았다. 온갖 고생 다해가며 자식들 다 키웠는데 나이 육십 다 되어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틈 없이 일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정말이지 민자씨 그녀도 도시 여자들처럼 신발에 흙 하나 않묻히고 살고 싶은 건 여자로서 당연한 심리였다. 넓고 멋진 인테리어로 장식된 아파트나 아니면 고급 빌라에서 집안 일이나 하고 남는 시간은 친구들 불러서 커피 마시며 수다도 떨고 맛있는 집 있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찾아가보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치밀어 올랐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겠지만 민자씨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신은 그럴만한 권리가 있는 여자였다. 그간 어디 한눈 파고 나쁜 짓한 적도 없고 게으르게 산 적도 없다. 한마디로 열심히 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좀 편하게 살 자격이 있는 게 아닌가. 이것 저것 다 팔아서 정리하면 남편과 함께 읍네로 나가서 예쁜 집 한 채 짓고 앞으로 20여 년간은 맘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물론 절약하며 살아야겠지만 말이다. 30여년을 넘게 살아온 부부이니 다른 한쪽의 분위기 파악이야 얼굴만 보면 답이 나오는 거 아닌가. 남편은 그녀를 보더니 싱겁게 한마디 내던졌다. “읍네 시장 갔다 왔다면서 왜 얼굴은 보리죽 먹은 사람같이 까칠혀” 민자씨는 대답 대신 남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당신 얼굴에 ‘나 사는 게 재미없소’ 하고 써있구먼. 뭔 일인데 그려” 역시 남편의 직감은 대단했다. 떡 본김에 제사지낸다는 말처럼 이왕 말 나온 김에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끝에 민자씨는 입을 열었다. “아이구. 읍네 나가서 돗자리 펴도 되겄수. 워째 그렇게 사람 속을 잘 알어유. 사실 어제 오늘 생각한 건 아닌데유. 우리도 이제는 생각 좀 해볼 필요가 있어유. 애들 다 컸는데 뭐하러 돈도 안되는 이 일을 더 하냐구유. 차라리 다 정리하고 읍네 나가서 살면 어때유. 난 진심여유. 나이 들어 말동무도 없이 여기서 외롭게 사는 것도 그렇구유. 일도 하기 귀찮어유. 온몸이 쑤시고 다리는 더 해유. 차라리 구멍가게를 하는 한이 있어두 이제는 목장 그만두고 싶어유” 남편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날마다 들어온 얘기처럼 아주 여유있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민자씨로서는 더욱 화만 나게 만들었다. “요즘같이 경기 안좋은 시절에 뭘 정리하구 어디를 가.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하는겨. 아 요즘 들어서야 내가 언제 당신한테 중노동 시켰어. 젖소 사료주고 살림하는 것도 싫으면 뭘 해먹구 살려구.” 불황의 책임을 왜 자신같이 열심히 살아온 서민이나 낙농가가 져야하는가. 책임이 있다면 정치인들이나, 탁상행정 공무원들, 그리고 악덕 기업인들에게 있다는 게 민자씨의 생각이었다. 특히 서로 이권다툼에만 눈이 멀고 온갖 비리는 다 만들어 내고 문제 생기면 국민 혈세로 땜질이나 하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이 문제가 아닌가. 민자씨 속이 터질 만큼 갑갑했다. “아이구. 경기 안좋은 게 왜 우리네 탓이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혀유. 불황이든 지랄이든 나는 더 이상 이 산골에 쳐 박혀 살고 싶지 않거든유. 당신은 여기가 좋은지 몰라도 나는 이젠 지겨워유. 경기가 어렵든 어떻든 간에 나는 이제부터 먹고 싶은 거 먹고 발에 흙 안묻히고 살고 싶네유. 그런 줄 알고 진지하게 생각 좀 혀봐유. 나도 더 이상은 소똥 냄새 맡기 싫다구유” 이쯤 되자 남편의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남편은 진지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정말 목장에서 사는게 싫은 거여.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을 없앨 수는 없는겨. 나는 아직까지는 젖소 팔아치운다는 생각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당신 좋은 쪽으로 하라구.”듣고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절이 싫은 중이 떠나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에 맺힌 것이다. “그려유. 난 가겄시유. 대신 먹고 살 거는 줘야지유. 당신 말 한번 잘했구먼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니까 내가 가겄시유. 흥” 화가 나서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니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황혼이혼이라는 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동창생의 말이 떠올랐고 이혼을 하게 되면 자식들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혼자 방 한칸 얻어 살 것인지 그것도 고민거리였다. 언젠가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애들 키우며 살아온 고향언니가 하던 말도 생각이 났다. 돈 못벌고 밤일 못해도 그래도 남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니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사람 아니면 이혼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평생 살면서 여자를 위한 배려나 살가운 정이 없이 그저 곰처럼 말없이 일만 하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갈테면 가라는 식의 멋대가리 없는 말 한마디에 남편에 대한 온갖 정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 사실이었다. 민자씨는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각오했다. 일도 좋고 별거도 좋으니 이놈의 촌구석은 반드시 떠나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 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그만 잠이 들어 곤하게 자다가 방문이 열리면서 들려오는 아들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직 새벽인데 큰 아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서 있는 게 아닌가.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들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이게 무슨일여요. 아버지는 흔들어 깨워도 못일어나시구 방문은 잠겨 있구. 아니 연세드신 분들이 왜 이러세요” 아직도 잠이 덜 깬 민자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응 시방 그게 무슨 말여. 넌 왜 이 시간에 집에를 ....,” 거실로 나가보니 식탁에는 가을에 병에 담근 포도주가 동이 나 있었고 남편은 옷 입은 체 그대로 거실바닥에 누워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방에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는데 홧김에 문을 닫다보니 그만 안에서 잠근 꼴이 되고 말아던 것이다. 남편은 방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문은 잠겨있고 말도 없고 하니 답답한 심정에 포도주를 꺼내 마시면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니 엄마가 이혼하려고 하니 어쩌면 좋겠냐” 며 하소연을 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싸움과 이혼 얘기에 놀란 아들은 민자씨까지 잠에 빠져 자느라 전화도 안 받자 걱정이 되어서 한밤중에 차를 몰고 집으로 내려왔다. 무엇보다도 아들의 어이없어 하는 모습에 민자씨는 창피스럽기도 하고 망신스럽기까지 했다. “야 야 너 아침에 출근해야 되잖어. 이 일을 어쩌냐. 빨리 한 두 시간이라도 눈 붙이고 올라가야지. 응.” 평소 과묵하고 조용한 아들이 화를 버럭 냈다. “나이가 몇인데 이혼 얘기를 하구 그래 엄마는. 아 정말 미치겠네. 이게 뭐예요” 나이가 들면 남편 보다 무서운 사람이 큰 아들 아니겠는가. 더욱이 홧김에 터져 나온 말 때문에 아들이 한밤중에 내려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니 아부지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혀서 나두 그냥 홧김에 한번 ....... 아이구 전화는 왜 혀. 저 양반 참 주책스럽기는.....,” 민자씨는 아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향해 이렇게 이혼설에 대한 응급처치(?)를 했다.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