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지는 참을 수가 없시유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청바지에 반소매 면티와 남방을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민자씨는 ‘원유가 현실화’ 이라는 피킷을 들고 사람이 줄을 서고 있는 광장 한가운데로 갔다. 화가 난 듯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는 묘한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울분의 결정체일 수도 있고 분노의 발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멀리 보이는 시위진압 차량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속 열기는 더 끓어올랐다. 이런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힌 것은 같은 지역 젊은 낙농인인 20대 중반의 영일씨였다. 그는 민자씨의 팔을 잡았다. “아이구 사모님 앞에 서시면 큰일나유. 앞쪽에는 젊은 사람들이 서있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힘있는 젊은이들이 앞장서야 하거든유.” “아- 알았어유.” 세 번째 줄에 선 민자씨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싸움 직전에 있는 사람처럼 식식거렸다. 그때 확성기를 통해 대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유값 인상 없이는 원유생산도 없다. 낙농가의 피와 땀을 빨아 먹는 흡혈귀가 될 것이냐. 아니면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냐. 그것은 제조업체 당신들이 신중히 판단해야할 문제다. 우리는 이제 단 한발도 물러 설 수가 없다. 최소 29.4% 인상을 보장해라” 대표자의 목소리는 쉬어서 갈라졌다. 힘이 드는지 중간에 목소리가 끊기기도 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프고 화가 끓어올랐다. 그 순간 민자씨는 더 이상 못참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앞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임시로 만든 단상위에는 낙농가를 대표하는 사람들 몇몇이 서있었다. 민자씨는 확성기를 든 대표자에게 말했다. “더 이상 못 참아유. 저한테 발언권 좀 주세유” 갑자기 뛰쳐나와 확성기를 달라는 민자씨를 보면서 조금은 당황하더니 그는 확성기를 건네주었다. 민자씨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유. 저는 충청도 청원 마동목장 오민자여유 . 시집올 때부터 지금까지 삼십 여 년간 오로지 한길 젖소 키우는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십년 전 만해도 두 아들 학교 보내고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사료 값은 오르고 원유값은 제자리걸음입니다. 여기에 온갖 물가는 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대로는 우리가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업인은 아니지만 우리는 몇 십년동안 국민건강과 직결되는 원유를 생산해왔습니다. 공직생활 오래하고 연예인생활도 오래하면 하다못해 공로상이라도 받습니다. 그런데 상장은커녕 은행 빚만 늘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제품회사들과 정부가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는 참을수가 없시유. 할복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처럼 자식들 다 키운 사람들은 힘들면 목장 안하면 됩니다. 하지만 20대, 30대, 40대 젊은 낙농인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안그렇습니까” 시위행진을 위해 줄을 서 있는 천 여명에 달하는 낙농인들이 동시에 팔을 올리면서 소리쳤다. “옳소! 옳소!” “원유가 인상! 원유가 인상!” 민자씨의 목에는 더 큰 힘이 생겨났다. 그녀는 마무리를 짓기로 하고 다시 확성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입니다. 유제품회사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가 되어 원유공급을 중단합시다. 어느 세상에서든지 동반자로서의 상생이 없이는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민자씨 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대표자는 확성기를 통해 말했다. “우리 충북 청원에서 올라온 오민자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더욱 힘이 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부터 우리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가두행진을 시작하겠습니다.” 대표자 말이 끝나자 스피커를 단 트럭이 앞장을 서면서 ‘농민가’ 노래가 흘러나왔다. 민자씨 양 옆에서 함께 걷는 두 남성은 민자씨의 용기 있는 발언에 대해 ‘용기가 대단하다’, ‘말을 너무 잘한다’, ‘속이 시원하다’ 고 말하면서 그녀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민자씨는 그런 인사 받고자 한 일이 아니었던데다 여전히 가슴속에서는 삭이지 못한 화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후레쉬들에 터지고 도로를 달리던 버스와 승용차들은 멈추어 서서 경적을 울려대고 시위대의 목소리 또한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땀은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모처럼만에 큰소리를 지속해서 낸 까닭일까. 목소리가 어느새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불의를 보고서 참지 못하는 오민자여사. 그녀는 젊은 시절에도 해본 적이 없는 시위를 하고 있지만 낙농가의 한사람으로서 주권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는 데에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바지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이 요란할만큼 흔들리며 진동음을 냈다. 핸드폰을 열었을때 그녀의 심장은 더욱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위급한 일. 아들 집으로 빨리 올 것. 나도 올라가고 있음” 남편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장난꾸러기 손자녀석이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소리없이 시위대 속에서 뒤처지듯 빠져나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아들 집으로 갔다. 가는 도중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으니 걱정과 불안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원유가 현실화도 중요하지만 첫 번째 손자이자, 장손인 녀석에게 무슨일이라도 생긴 것 같아 그녀는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을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이 또 무슨 장난같은 일인가. 아들집에 도착하자 손자녀석은 달여와 안겼고 주말인지라 아들 며느리 모두 집에 있었다. 다만 아들은 여느때와 다른 복장과 흥분된 얼굴로 찾아온 그녀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볼 뿐이었다. “별일없냐. 느 아버지는 뭔 일로 그렇게 다급한 문자를 보냈다냐. 심장 떨리게” 그러자 아들 대신 손자녀석이 먼저 말했다. “할무니. 나 아까 텔레비전서 할머니 봤다. 와 할머니 목소리 엄청 크더라. 그래서 엄마가 할아부지 한테 전화했어. 히히히” 순간 민자씨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아무생각 나질 않았다. 단상에 올라가 미친듯이 말을 할때 어느 방송에선가 촬영을 하여 낮12시 뉴스에 내보낸 거였다. 부끄러운 일을 한것은 아니지만 일단 자신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고 더욱이 일곱 살난 손자 녀석과 며느리와 아들 다 보았으니 작은 일은 아니었다.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심정은 너무도 잘 이해하지만 나이도 있고 한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나이에 경찰 물대포 맞아 쓰러지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며느리도 거들었다. “맞아요. 어머님. 다치시면 어쩌실려구요. 게다가 방송까지 나왔으니....,” 민자씨 죄 지은 일도 아니고 하면 안되는 일한 것도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마음 뿐이었고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손자녀석이 다시 야릇한 질문을 해왔다. “할무니 경찰들이 안끌고 갔어요. 할무니처럼 큰소리로 말하면 끌려간데요.” 어떻게 말을 해줘야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순간 민자씨 “응. 할무니는 우리 어린이들 우유 많이 먹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어. 그래서 경찰아저씨들한테 안끌려갔어.”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상기된 얼굴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여편네야 참가하려면 그냥 따라다니기만 할 것이지, 누가 단상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라고 했어? 집에 전화가 수십통이 걸려 왔어. 신문사서 인터뷰도 하러 온다는 구먼. 그리고 무슨 회사 노조에서는 강의를 해달라는 전화도 왔구. 나 참 전화 받기가 무섭더라구. 아주 인기스타 탄생이라니까. 그려” 이 일로 인해 민자씨 3박4일을 아들 집에 갇혀 살아야했단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단다. 그런 후 집으로 민자씨 집으로 내려가자 며칠동안 외부 전화에 시달린 남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니 방송사 신문사 사람들은 왜 그렇게 끈질겨. 엊그제는 아예 한나절동안을 당신 기다리다가 갔다니까. 아니 다른 사람들보 많은데 하필이면 왜 임자만 그렇게 찾는 겨.” 민자씨 입이 참지 못하고 또 한번 사고를 쳤다. “뭐 내 미모가 카메라 발 좀 받나보네.” 그 순간, 남편의 얼굴과 눈에 빨간신호등이 켜지고 있었다.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