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나간 것들여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 어제 경숙이하고 수영복 사러 갔다가 배꼽 잡았어. 경숙이 살이 쪘잖아. 저 나름대로 예쁜걸 고른다고 고르면 싸이즈가 없는 거 있지. 니 몸매 정도는 되어야지 아무거나 다 잘 맞는데” “그려. 모처럼만에 신혼여행 기분 느껴 보라구. 여유 있으면 놀러 다녀야지. 더 나이 들면 놀러도 못다녀” “어머 그런데 민자야, 왕년에 학생회장인 네가 않가니 좀 이상하다.” “나이 들어 별걸 다 신경쓰네.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갔다 오면 되지. 큰 며느리로 시집온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잘 들 갔다와.” “알았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민자 선물은 꼭 사올게” 추석을 사흘 앞두고 공항에서 걸려온 여고시절 친구 순자의 전화였다. 나이가 들어도 여행을 앞둔 기분은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여고 동창생들 중 연락을 하고 지내는 10여명이 추석 연휴기간동안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대부분 서울 사는 친구들로 자주 모이다 보니 나이 들어 뒤늦게나마 의기투합한 모양이다. 자그마치 60여만 명이 추석연휴기간 해외로 떠났다니 누구든 주변에 한두사람은 여행을 떠났을 일이다. 벌써 두 달 전부터 민자씨에게도 연락이 왔지만 연휴가 한달이라도 민자씨로서는 갈수 없는 상황이다. 자식 같은 젖소들을 5일동안이나 방치해둘 수도 없고 대신 맡아줄수도 없는 데다 또 한곳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안사돈이 중환자실에 누워 사경을 헤메고 있는 것이다. 민자씨보다 나이 한살 더 먹었으니 이제 쉰 여덟인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벌써 한달 째 병실에 누워있는 중이다.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먹는 것은 목으로 환자용 영양제만 먹는 정도니 그야말로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자식이라고는 달랑 외동 딸 그러니까 민자씨의 큰며느리 하나뿐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병원에 두차례나 다녀왔지만 안사돈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는 듯 했다. 며느리는 매일같이 병원에 가보긴 하지만 마음만 아플 뿐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니 민자씨로서는 안사돈도 안사돈이지만 며느리가 너무 안되었다 싶어 마음이 아팠다. 명절이라고 내려온다고 하는 것을 그러지 말라고 했다. 누워 있는 친정엄마나 잘 챙기라고 했다. 그런데도 민자씨 걱정스럽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육십부터 청춘이라는데 아직 예순살도 안되어서 식물인간이 된다는 것은 설령 친인척이 아닐지라도 슬픈 일이 아닌가? 추석이라고 아들이 손자를 데리고 내려왔지만 민자씨 마음은 오히려 며느리한테 가 있었다. ‘ 밥이나 제대로 먹고 병간호를 하는 건지’. ‘송편 하나 못 먹었을텐데’. ‘저러다 안사돈 저세상으로 떠나면 의지할 곳 없는 며느리 불쌍해서 어쩌나’ 등등. 이런 민자씨 마음을 알았는지 자상한 남편은 말을 건넸다. “며늘 아이 송편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네. 가뜩이나 마른애가 친정엄마 때문에 마음 써서 그런지 더 말라 보이더라구. 큰애 올라갈 때 같이 가서 뭐 먹을거라도 해주고 오지 그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던가. 민자씨도 걱정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세심한 생각은 못했는데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려유. 애가 더 말랐던데. 당신은 역시 다르네유.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말 나온 김에 갔다올까유” “아 두 시간이면 올라가는데 갔다가 오지 그려. 가서 소족이라도 고아 놓고 오라구. 며느리도 먹고 큰 애도 먹게. 참 우리 동준이도 먹어야지. 나야 밥만 있으면 찾아먹을테니 아무 걱정 말고 가서 하룻밤 자고 오라구. 반찬이라도 해놓고 오려면 오늘 저녁에 내려오긴 힘드니까.” 민자씨 추석날 오후 아들의 차에 묻어 서울을 올라갔다. 떡하고 전을 싸가지고 병원으로 가니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는 혼자서 쓸쓸히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울었는지 눈은 벌겋고 퉁퉁 부어 있었다. “동준이 외할머니는 좀 어떠시냐.” 며느리는 갑자기 울먹이며 고개를 숙인 체 말한다. “오늘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몸에 합병증 증세가 와서 오래 못 버티실거래요.” 며느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차마 민자씨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한손으로 며느리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며느리 등을 두들기면서 민자씨는 말했다. “울지 마. 니가 이러면 안돼. 너라도 강한 맘 먹고 보살펴드려야지. 여기는 동준애비한테 있으라고 하고 너는 집에 가서 잠이라도 좀 자. 동준애비 내일 출근 안한다는데 오늘은 여기 있으라고 해. 어쩌려고 이러냐. 얼굴이 반쪽이 됐구먼” 민자씨는 손자와 며느리 손을 잡고 아들 집으로 갔다. 밥을 하겠다는 며느리에게 부족한 잠이나 자라고 하고 민자씨는 시장을 봐 왔다. 찜통에 소족을 넣고 서너 시간을 끓였다. 밥도 하고 밑반찬도 몇 가지 만들었다. 그리고 김치도 담았다. 한참을 자다가 일어난 며느리는 모처럼만에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한편으로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김치며 밑반찬 어느 것 하나 입에 안당기는 것이 없다며 밥을 맛있게 먹었다. 손자 동준이도 할머니가 만든 김치가 맛있다면서 매운데도 불구하고 밥 한공기를 다 먹어 치웠다. 이튿날 민자씨 집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는 며느리한테도 더 살갑게 대해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친척이 많은 것도 아니고 형제도 없는데 친정엄마까지 돌아가시면 그야말로 외롭고 쓸쓸한 그 속내를 누가 알겠는가. 동창생들과 해외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며느리에 대한 사랑도 더 깊어졌고 이른 나이에 쓰러져 누워있는 안사돈에 대한 인사는 했다 싶어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물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안사돈을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일 이지만 이제는 인력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기적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마음만이라도 잘 되기만을 비는 수 밖에 없었다. 며느리는 민자씨의 사랑에 감동했는지 전화를 통해 “어머님 너무 감사합니다” 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게다가 민자씨 남편은 며느리에게 병원비라도 보태라고 50만원을 선뜻 보냈으니 며느리로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시부모가 고맙고 큰 힘으로 느껴지는 거였다.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말은 민자씨에게는 처음부터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딸이 없어서인지 며느리가 시집올 때부터 내 자식처럼 여기고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다만 떨어져 살다보니 마음만큼 잘해주지 못한 게 아쉬웠을 뿐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이틀이 지났을까? 아침 일찍부터 동창생 경숙이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니들 내일 오는 날 아녀” “그래. 어머 그런데 우리 어제 밤에 왔어. 아이구 속상해서 어쩌면 좋다니. 글쎄 하롱베이인가 거기 가다가 우리가 탄 작은 버스가 사고가 났지 뭐니. 달려 오던 승용차와 부딪쳐서 도로가 풀숲으로 뒹굴었어. 낭떠러지에서 그랬으면 다 죽었을 거야. 다행이도 대형사고는 면했지만 순자네 부부가 둘 다 심하게 다쳤어. 순자는 팔이 부러지고 신랑은 목을 다쳤어. 그러니 여행이고 뭐고 다 끝난 거지. 병원으로 실려 가고 난리가 났지 뭐야. 순자 남편은 서울 오자마자 병원에 입원 했어” 동남아 관광은 위험한 요소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가까운 동창생들에게서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민자씨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구먼. 많이 놀랬겠네. 모처럼만에 간 여행이 그렇게 끝나서 어쩌냐. 쯧 쯔” 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남편이 헛기침을 했다. 통화내용을 엿들었는가보다. 민자씨로서는 그래도 친구들인지라 사고가 그 정도였기 다행이다 싶어 다시 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남편은 궁금했던 뉴스라도 들은 듯 이번에는 비꼬듯 말을 걸었다. “그래 뭔 일로 그렇게 빨리 왔다는 겨. 비싼 돈 주고 여행을 갔는데” “나도 잘모르겄시유. 타고 가던 버스가 사고를 냈나봐유” 그러자 남편이 하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조상 안모시고 놀러 갔으니 죄 받은 거여. 그럼 죄받지. 누가 추석명절에 그것도 해외로 여행을 다녀. 정신 나간 것들여” 더 이상 민자씨는 여행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칫하면 자신마저도 정신 나간 여자 취급할까 두려워서.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