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이 그 놈여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 오빠 이게 몇 년 만이래유.” “세월 참 많이 흘렀지.” “그럼유. 나두 손자까지 봤으니까유.” “그러게 말여. 나도 많이 늙었어. 내년이면 환갑여” “세월 참 잘가유. 낼 모레 정숙이 아들 결혼식에 오실거지유. 그때 얼굴 좀 봐유.” “그려. 조카 장가가는데 가야지. 거기서 보자구” “알었시유. 오빠.” 전화를 끊고 나서도 민자씨는 한참동안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사십년이 지난 얘기지만 추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영화 필름처럼 움직였다. 읍내 살던 정숙이네 오빠는 당시 그야말로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잘생긴 남자였다. 그녀가 1학년 때 3학년이었던 현규씨는 읍내 남고 학생회장을 하다가 이듬해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여동생인 정숙이의 소개로 민자씨를 만나 둘이 한동안 사귀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그는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같이 딸기밭에 가서 데이트도 하고 그랬다. 방학때는 정숙씨와 셋이서 같이 여행도 갔고 늦은 밤에 동네어귀 과수원 앞에서 만나 그야말로 청순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녀가 고3이 되던 어느 날 현규씨는 군대를 갔고 그에게서 온 편지를 아버지에 들켜 민자씨는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 실컸 두둘겨 맞았다. 그리고 그 후 현규씨와 연락을 끊었다. 아니 끊을수밖에 없었다. 민자씨에게 온 현규씨 편지는 모조리 민자씨 아버지의 손에서 찢겨졌다.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고 민자씨는 결혼을 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현규씨가 군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해서도 자신을 못 잊고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눈물겨운 첫사랑의 추억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자씨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이제 흰머리가 잔뜩 나 있을 현규씨를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민자씨의 전화통화를 지켜봤던 남편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말했다. “오빠라구. 다 늙어서 뭔 놈의 오빠여” “얼래 저 양반 좀 봐. 늙긴 내가 뭘 늙었다구 그래유. 마음은 아직두 이팔청춘인걸.” “옛날 애인이라도 되는가 보던데. ‘ 오빠 그때 얼굴 좀 봐유 ’ 하는 당신 표정이 어떠했는지 알어. 저 읍내 삼거리 다방 마담은 저리가라더구먼. 허 참 나. 나이 들어 별일이구먼” “어디 나를 다방 마담한테 비교해유. 아 잠이나 자유. 남이야 옛날 애인을 만나던 오빠를 만나던 뭔 상관이래유. 알구나 있시유? 자기는 더 늙었어유. 흥”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구 감정까지 늙을 수 있겠는가. 사실 민자씨 말을 않해서 그렇지 아직도 텔레비전에 미끈하게 잘 생긴 40~50대 남자들 나오면 눈 한 번 더 가지는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손자까지 본 나이에 바람을 피워보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고, 사랑의 감정은 여전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민자씨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민자씨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이 뜨끔하긴 했다. “옛날 애인이라도 되는가보던데.” 라는 남편의 말은 너무도 정확한 말이 아니었는가? 토요일 새벽부터 민자씨는 바빴다. 남편의 아침상을 차려주고 점심때 먹을 반찬도 별도로 준비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침 생각도 없는데다 시간이 없어 민자씨는 남편 혼자 밥을 먹으라고 하고 옷을 입었다. 2년 전 며느리가 해준 검은색 투피스을 입었다. 속에는 하얀 브라우스를 입어 포인트를 주었느데 한가지 머리가 걸렸다. 퍼머기도 좀 약해진 것 같고 염색한 지도 오래되어 흰머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안되겠다 싶어 드라이어로 머리를 좀 가지런히 펴서 올렸다. 여느때와는 달리 드라이어로 오랫동안 머리를 매만지며 부산을 떠는 그녀를 보는 남편의 얼굴은 그다지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남의 별궁예식장을 찾아간 민자씨. 동창생 몇 명을 만나 수다를 떨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정작 보고 싶었던 첫사랑 현규씨는 찾을수가 없었다. 워낙 사람이 많은데다 사십여년이 지난 후에 서로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때 현규씨의 여동생이자 동창이고 이날 결혼식의 신랑어머니인 정숙씨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이미 통화를 했던 터라 정숙씨는 민자씨에게 오빠를 만나보았느냐고 물었고 민자씨는 볼수가 없었다고 했다. 여고시절이나 나이들어서나 늘 불같은 성격의 정숙씨는 민자씨의 손을 잡아 끌고 한 테이블로 가더니 중후한 모습의 한 신사에게 민자씨를 인사시켰다. 바로 현규씨였다. 젊었을때의 모습이 남아있긴 했지만 체격은 훨씬 더 커진듯했고 멋지게 늙어가는 장년의 여유가 베어있었다. 예식이 끝나고 현규씨와 민자씨 두사람은 함께 인근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자씨는 아직도 이삼십대처럼 젊어보이네” “오빠야말로 나이에 비해 너무 젊어보이고 멋지시네. 유사모님이 잘 해주시나봐유” “무슨. 나 혼자 살어. 몇 년전 상처했거든” “어머 정숙이는 그런 얘기 않하던데....., 어쨌든 오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근사해유. 아직 나이가 있는데 재혼하셔야지유” “글쎄. 그렇긴한데 서로 맞는 사람이 있어야지. 우리 민자씨 같은 사람 어디 없나” “얼래. 오빠는 농담두 잘혀. 나 같은 할머니를 어디다 써유. 그나저나 그래 뭘 하셔유.” “나는 유통업해. 쇠고기, 돼지고기” “그러셨어유. 오빠는 선생님이나 공무원 같은 거 하실것 같었거든유” “회사 다니다가 IMF때 그만두고 줄곧 유통업에 손댔어. 백화점 할인점에 납품하거든. 도매상이나 마찬가지여” 민자씨와 현규씨는 이런 저런 얘기로 두어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사겠다는 현규씨의 제의에 민자씨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둘러 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이상한 것 한가지는 민자씨 가슴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그리움 내지는 아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주인공은 현규씨였다.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하여 남자다운 얼굴에 자상함이 얹혀져 그야말로 멋진 장년이 된 현규씨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매력과 그런 그가 혼자 산다는것에 대한 측은함이 교차되곤 했다.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자기 차로 데려다주면서 다음에 꼭 다시 한번 만나자며 손을 흔들던 현규씨의 얼굴이 민자씨의 머릿속을 흔들어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저녁도 먹지않은 체 방바닥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미안한 생각에 남편 저녁상을 준비하려구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는데 TV 뉴스에서는 이런 방송이 흘러나왔다. - “산지에서 판매되는 한우 한 마리 가격은 489만원입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805만원에 구입하는게 현실입니다. 이쯤 되고보니 수입쇠고기가 잘 팔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면서 가격이 터무늬없이 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산자(농가) - 중간 도매업자(중도매인)→도매업자→정육점·음식점을 거쳐 소비자가 구입하는 구조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도매인 도매업자 정육점이나 마켓이 각각 10~20%의 높은 마진을 취하다보니 결국 소비자만 비싼 쇠고기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유통구조는 하루빨리 개선되어져야 합니다. 특히 도매업자들과 소매점들은 각각 20% 내외의 고마진을 취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앵커의 말이 끝나자 마자 민자씨는 현규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쇠고기 중간도매상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편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유통업자 저놈들 다 도둑놈들여. 저런 놈들 때문에 나라가 어렵고 축산농가들이 힘들어져. 저런 놈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유통업자라고 다 그런가유. 나쁜 놈들이 따로 있겄지유.” 민자씨의 말에 남편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붙였다. 마치 비꼬듯이 “그래, 옛날애인인가 오빠인가는 만났어” “아이구 참 나이 들어서 별 참견을 다한다니까. 그려유. 만나서 커피도 한잔했시유” “우리 오여사님 오늘 신나셨겠수. 그래 그 사람은 지금 뭐한답니까” 순간 민자씨 막막했다. 쇠고기 유통업을 한다고 했다가는 그야말로 망신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래서 엉겁결에 한말은 그녀 자신이 말해놓고도 여간 우습지가 않았다. “유- 통. 아 아니 그게 아니구. 거시기, 그거 한데유. 유기농산물 도매점유” 그러자 남편이 하는 말은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농민이 생산한 것 싸게 갔다 비싸게 팔기는 똑같은 거네. 그럼 그렇지. 그 놈이 그놈여” 그날 밤 그 순간 이후 민자씨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현규씨에 대한 아련한 추억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