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잊으리 잊으리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 찾는 개나리 처녀. 음 음 음 라라라라 이팔청춘 봄이와요” 민자씨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아침부터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석유기름 아끼려고 찬물에 설걷이를 하면서도 손 시린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스치며 군인 간 오라버님은 소식이 없네. 큰 애기 사공이면 ......” 주책스러울 만큼 아침부터 노래를 흥얼거리며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담은 민자씨를 보면서 남편은 당황스럽다못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뭔 일이 있길래 안하던 짓을 하는 겨 그래. 낼 모레면 환갑 맞이할 여자가 아침부터 노래를 다 흥얼거리구” 평소 못 보던 모습이니 남편으로서는 마누라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인 것이다. 참으로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잘난 민자씨가 정신이 갑자기 이상해질 리가 있겠는가? 남편에게 말을 안했을 뿐, 그녀는 밤 새 기가 막히게 좋은 꿈을 꾼 것이다. 꿈은 본래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면 복이 달아나 물거품이 되는데다 아침 밥상에서는 꺼내기 좀 불편한 내용이었으니 혼자서만 좋아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 정신 멀쩡하니까 걱정 붇들어매유. 나 한테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니 이틀만 참아줘유. 그냥 내버려두면 돼유. 아셨지유” 설걷이를 끝낸 민자씨는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전화를 걸었다. “아 나여. 목장댁이라구. 오늘 내가 점심 살 테니까 가게는 신랑한테 맡기구 거기 있지 왜 삼거리 칼국수 집 그리로 와. 참 정육점집 여자도 데리고 오라구.” 이왕 기분 좋은 김에 화장도 해야겠다싶어 코트를 벗어던지고 거울 앞에 앉은 민자씨는 한동안 하지 않았던 화장을 시작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피부는 아직 화장이 먹을 만큼 부드럽고 촉촉했다. 파운데이션을 옅게 바르고 아이라인을 긋고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나니 민자씨 자신이 보기에도 10년은 더 젊어보였다. 화장을 하는 순간도 그녀의 콧노래는 예외가 아니었다. “내일이면 잊으리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영원 하지도 않더라. 아침에 피었다가 .........” 노래를 아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음치도 아니었다. 민자씨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흥얼흥얼 나오는 노래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야,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이미 고조된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장을 하고 나자 코트가 웬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녀는 가죽점퍼를 꺼내 입었다. 10년이 넘은 옷이지만 그래도 갈색가죽점퍼는 검은 스커트에 검은 폴라티를 입고 그 위에 걸쳐주면 나름대로 세련되고 젊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제격이었다. 안하던 화장을 하고 한겨울에 스커트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은 그야말로 화난 얼굴의 청동상 같았다. 자기 마누라가 바람기 있는 여자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갑자기 달라진 모습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치였다. 아니 속으로는 “나이 들어 주책이다 주책” 하며 소리를 치는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민자씨 생각은 오로지 하나 바로 그거였다. 읍네 삼거리 한 켠에 차를 세우고 칼국수 집으로 들어가자 수퍼댁과 정육점집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여. 갑자기. 어머머 목장댁 바람이라도 난 거 아녀. 옷 차림 좀 보라구. 몸매 따라주니 20년은 더 젊어 보이네. 화장도 짙게 하구” 친하게 지내는 수퍼댁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육점집 여자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목장댁 바람났나봐. 워매. 엄청나게 젊어 보여. 어찌된 일이랴. 거기다 점심도 한턱 내구” “아무일도 없시유. 모처럼만에 화장 한번 했더니 난리들이네. 나 같은 할머니가 무슨 바람이 나겄시유. 여러말 말구 칼국수나 먹읍시다. 만두도 두 판만 시킬까. 여기 만두 맛있던데” 평소에는 늘 아끼고 아끼는 민자씨였지만 오늘 만큼은 화끈하게 한턱내고 싶었다. 그래야 2만원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칼국수를 먹고 나자 민자씨 2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제의했고 세여자는 대낮부터 노래방에 들어가 신나게 놀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니기에 음료수 하나씩 사놓고 장장 두 시간 동안 발에 땀나도록 놀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수퍼댁과 정육점집 여자는 뭔가 수상하다는 눈치였지만 민자씨는 절대로 친한 두여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비밀 때문에. 노래방에서 나와 두 여자와 헤어진 민자씨가 정신없이 달려간 곳은 다름아닌 편의점. 만원짜리 지폐를 내고 그녀가 당당하게 구입한 것은 다름 아닌 로또복권이었다. 전날밤 꿈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친정엄마가 나타났다. 엄마는 그녀를 끌고 허름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더니 당장 변소를 다녀오라고 호통을 쳤다.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화장실로 갔는데 바로 여기서 대박 날 조짐을 느끼게 하는 대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재래식 화장실에 대변보는 자세로 앉은 그녀. 하지만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발밑을 받치고 있는 나무가 우두둑 부러지면서 민자씨 그만 두 다리가 똥통에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리 나오려고 해도 똥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민자씨. 꿈속에서 그녀는 “나 살려” “나 살려”하며 소리를 지르다 깨어난 것이다. 예로부터 돈이 들어올 꿈은 시체를 보았거나, 피를 볼 경우 또는 돼지를 잡았다거나, 똥이 몸에 묻는 경우이니, 분명 대박이 터질 일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큰돈을 줍거나 복권에 당첨되는 등 공짜로 행운을 잡는 기회는 단 한번도 없었던 그녀였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그녀는 꿈이 곧 좋은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왕 기분 좋은 날이니 남편이 좋아하는 추어탕을 끓여주고자 팔딱거리며 요동치는 미꾸라지도 사고 자신이 좋아하는 황태도 두 마리 사는 등 모처럼만에 돈을 좀 썼다. 그렇게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민자씨는 집에 와서도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지었고 마치 손님 대접하듯 식탁에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올려놓고 남편과 함께 넉넉한 만찬을 즐겼다. 목요일 저녁이니 빨리 이틀밤이 지나가길 그녀는 학수고대했다. 물론 그녀의 기분은 토요일 저녁까지 사그라들 줄 모르고 고조된 상태로 이어갔다. 드디어 토요일 저녁이 되었다. 로또 복권 추첨 시간이 다가오자, 민자씨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1등 당첨금은 얼마나 될까? 당첨금은 어떻게 쓸까? 목장은 누구한테 몇 년간 임대를 해주고 한 1년간 남편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올까? 아들들 집 한 채씩 사줘야 할까? 별의 별 상상을 다 즐기면서 민자씨 가슴은 갈수록 무언가에 쫓기는 듯 긴장되었다. 드디어 추첨시간이 되었고 로또번호가 새겨진 공이 돌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운명의 시간이었다. 민자씨 그 순간 너무 떨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번호를 재빠르게 종이에 적고 지갑에서 로또 열장을 꺼내 주방 식탁으로 갔다. 볼펜으로 추첨번호와 같은 숫자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처음 세장은 하나 아니면 두개만 맞았다. 하지만 또 다른 두장은 번호가 세 개씩이나 맞았다. 나머지 다섯 장 중 세장은 다시 하나 아니면 하나도 맞질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두장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동그라미를 쳐 나갔다. 하나, 둘. 하지만 더 이상 동그라미를 칠 숫자는 없었다. 기본 5천원짜리 두 장이 된 것이 전부였다. 순간 민자씨 긴장이 풀리면서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꿈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꿈만 믿고 그날 읍내 나가서 자그마치 8만원의 돈을 쓰고 돌아온 것을 생각하니 여간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민자씨. 남편에게 화풀이를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아가신 엄마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 그녀는 허공을 향해 혼자말로 말했다. “내가 미쳤지. 만원 벌자고 8만원을 날렸으니. 개꿈을 믿었어. 개꿈을”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다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내일이면 잊으리 잊으리 개꿈 꾸고 로또 산 것을 ......,”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