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열차’, 민자누님과 같이 타고 떠납니다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니 들은 늙지도 않니. 워째 그렇게 화사하냐. 옥자 너는 시집 다시 가도 되겠다. 아무래두 서울 물이 좋은가본데. 나도 목장 때려치우고 서울로 이사나 올까 보다” “이 아줌마가 웃기고 있네. 봄이면 나물 뜯어다 밥 비벼 먹고 여름에는 온갖 과일 다 따먹고 어휴 시골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어. 자기는 복 받은 줄이나 알아.” “그래 옥자 말이 맞아. 어떤 애들은 그래도 서울이 좋다는데. 난 안그래. 돈 있으면 시골 내려가서 농장이나 했으면 좋겠어. 포도나 뭐 그런 거 키우고” “당연하지. 요즘은 시골 살아도 차있고 뭐 있고 다 있잖아. 오민자 니 얼굴도 옥자 뺨쳐야. 어쩜 저렇게 안늙었어. 원래 얼굴이 이쁘긴 했지만.” 여고 동창생 딸 결혼식에 갔다가 점심 먹고 나서 동창들과 차 한잔 마시며 수다를 떨다보니 시간은 벌써 저녁 다섯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서둘러 내려가야 할 판인데 어찌된 일인지 엉덩이가 들리질 않았다. 모처럼만에 만난 친구들과 떠들다보니 젊은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젊으나 늙으나 언제 보아도 늘 좋은 게 친구라더니 그 말은 정답이었다. 어떤 말이든 눈치 볼 것도 없는데다 조심스러울것도 없어 마냥 편안한 친구들이 좋긴 좋았다. 남편 흉부터 자식 자랑가지 여자들은 한번 입을 열면 끝낼 줄을 몰랐다. 커피 리필을 시켜가면서 한참을 떠들었을까. 학창시절부터 놀기 좋아하는 연숙이가 나섰다. “야, 충청도 촌딱들 주목 좀 해봐라.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만나는 것도 아닌데다 이제 남편 눈치 볼 나이도 아니고 하니 오늘은 한바탕 놀다 가자구. 영계들이 도우미로 나오는 노래방을 내 알고 있거든. 어때. 싫은 사람 있으면 안가구. 우린 민주주의니까.” “어머 영계. 몇 살인데. 그래두 우리 아들보다는 나이가 있어야 되지 않냐.” “아따 지집애. 그럼 니는 스무 세살 짜리 하고 놀려구 했나. 걱정 붙들어 매 사십대 잘 빠진 애들이야. 대신 느그들 팁은 이만원씩 줘야 한다” “우리가 이 나이에 팁 없어서 못 놀겠니. 어디야. 가자” 서울이야 아들집도 있고 여동생들도 있고 해서 잠자리야 걱정 없었지만 남편에게는 자고 온다는 말도 하지 않고 올라왔기에 마음이 심란했다. 이런 민자씨 속마음을 읽은 평자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자신이 남편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거였다. 밥도 않해 놓고 찌게도 않끓여 놓고 온 터라 그녀로서는 저녁과 내일 아침 두 끼를 남편이 어떻게 해결할까 걱정이 되는 일이었다. 친구 평자는 요조숙녀처럼 목소리를 내면서 남편에게 동창생들끼리 아주 오랜만에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됐으니 이해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짜장면도 시켜먹을 수 없는 산골에서 남편이 혼자 밥을 해먹을 생각을 하니 민자씨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옆집 형식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부탁을 했다. 물론 형식 엄마는 걱정 붙들어 메고 잘 놀다오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 신랑 밥도 안해주고 놀러 다니는 자신이 너무 철없이 느껴졌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게 TV만 쳐다보면서 밤을 보낼 남편이 안쓰럽기만 했다. 남자들이 도우미로 들어온다는 노래방에 도착하자 동창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울을 쳐다보면서 마치 맞선이라도 보는 여자들처럼 내숭을 떨고 앉아 도우미들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여자들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기하고 있는 남자들이 두 명 밖에 되지 않으니 짝을 맞출 수가 없다는 게 아닌가? 민자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몇몇은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 허탈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짝이 맞지 않는다고 놀지 않을 여자들이 아니었다. 둘이든 하나든 재미있게만 놀자는 옥자의 말에 동창들은 다시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누님들. 부르시고 싶은 노래 있으시면 거침없이 번호만 알려주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즐거운 시간 되도록 하겠습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두 남자는 여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 술잔에 술을 따르는가하면 안주를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단란주점 아가씨들이 남자손님 접대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동백아가씨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이어서 남자도우미중 한사람이 아파트를 부르면서 여자들을 하나둘씩 일으켜 세워 춤을 추게 했다. 민자씨는 촌 여자답게 구석에서 앉아 노는 모습만 쳐다봤다. 누군가가 메들리를 눌렀는지 10여분이 넘도록 여자들은 정신없이 흔들어대며 웃고 떠들며 손뼉을 치고 그렇게 정신없이 놀았다. 모두들 지쳤는지 음악이 끝나자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 도우미 중 한 남자가 민자씨의 손을 잡아 끄는 게 아닌가. “자 우리 누님은 오늘 한번도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벌칙으로 노래 한곡 하셔야 됩니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곽 잡고는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억지로 끌려나오는 민자씨의 당황해하는 얼굴이 볼만했는지 동창들은 박수를 쳐가며 한바탕 웃어댔다. 이왕 이일이 이렇게된 것 어쩌겠는가. 민자씨 용기를 내어 노래곡명을 말했다. “저 김수희의 ‘비 내리는 호남선’요.” 그러자 또 한바탕 웃느라고 난리가 났다. “네 좋습니다. 김수희의 ‘남행열차’, 민자누님과 같이 타고 떠납니다” 남자는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었고 민자씨는 얼떨결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 남자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면서 몸을 부딪혔지만 시골아낙네 민자씨는 오로지 박자를 놓칠까봐 잔뜩 긴장한 나머지 두 손으로 마이크만 죽기 살기로 붙잡은 체 화면에 나오는 가사에만 집중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두 어 시간 아줌마들의 노래방 광란은 끝나고 동창생들은 노래방에서 나왔다. 저마다 방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갈 길을 정하는데 옥자가 뛰어오더니 자기네집도 민자씨 여동생집이 있는 옥수동과 같은 방향이라며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그녀의 팔짱에는 그만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옥자의 성화에 못 이겨 노래방 근처 호프집으로 다시 끌려간 민자씨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왔는지 동창들을 끌고 왔던 연숙이와 좀 전까지 같이 놀던 남자 도우미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어머머 시골 아줌마가 인기는 더 좋다니까. 이 동생이 너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난리잖아. 그래서 우리들끼리 맥주 한잔 더하자고 한 거야”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남자 곁에 앉게 된 민자씨. 그녀에게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젊고 훤칠한 남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앞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마치 도둑질하는 사람의 심정같이 좀처럼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술잔위에 남편의 얼굴이 아른거리기도 하고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더욱 난감한 것은 남자는 자꾸만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였다. 그것도 강렬한 눈빛으로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이. 순간 민자씨는 들고 있던 술잔을 자기도 모르게 놓치고 말았다. 결국 술잔은 바닥으로 나뒹굴면서 소리를 내며 깨졌고 일을 저지른 민자씨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스커트 위로 맥주가 약간 쏟아져 그냥 있을 수 없었던 민자씨는 당황스럽고 놀란 나머지 화장실로 달려갔다. 치마에 묻은 맥주를 손수건으로 눌러 물기를 제거하고 손을 씻고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찬 손수건으로 맛사지 해주고서야 겨우 정신이 나는 듯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민자씨는 테이블로 들어가는 귀퉁이에서 그만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듣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누님 예전에도 미인이셨잖아요. 우리가 초등학생 때 누님들은 여고생이셨으니까. 그때 우리 큰누님이 저 누님과 같은 단짝이었는데. 누님들 보니까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누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오네요.” “어머 그랬구나. 화자 막내동생 이었구나. 허기사 벌써 40년이 흘렀는데” 울먹이는 남자 때문인지 옥자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민자씨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을 좋아해서 유혹을 손길을 뻗치려는줄 만 알았던 남자가 자신의 여고시절 단짝인 순미 막내 동생 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녀는 속절없는 인생 안타까운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느꼈다.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