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겨.” “이거 언니 것. 유럽 여자들은 숄을 많이 하더라구요. 젊은 애든 나이 든 사람든 할 것 없이 둘 중 하나는 하고 다니더라니까요. 나 같은 숏다리야 품위가 별로 안 나지만 언니처럼 키 있고 날씬한 사람들은 정장이든 한복이든 차려입고 이거 두르면 공작부인이 따로 없는 거예요. 그래도 언니 생각이 제일먼저 나더라. 선물 한번 제대로 해준 적 없는데 이참에 하나 해야 되겠다 싶어 내가 돈 좀 썼수. “아이구 고모는 참. 비싼 거 이런걸 뭐하러 사와유. 경비만 해도 이삼백 들어 간다고 들었는데. 그냥 받을라니 미안혀서 어쩐대유” “아이구 언니는 받을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그런 생각 하질 말아요. 나 학교 다닐때 언니가 도시락 싸주고 옷 다려주고 하던 거 생각하면 내가 열 두번도 더 사다줘야 된다니까. 저기, 그리고 이건 오빠 건데. 울 오빠 분위기에는 그냥 딱이지 뭐. 내가 매장 들어가서 보는 순간 한번에 찍었잖수. 근사한 울 오빠한테는 그냥 브이 넥 셔츠스타일이 딱이지 뭐. 넥타이하고 추운날은 꼭 이거 입고 나가라구 하세요. 알았죠 언니” “정말 그렇네유. 어디 잔치집이나 읍내 행사 있어 나갈 때마다 벌써 몇 년째 저 조끼만 입고 다녔는데 마침 잘됐네유. 따뜻해 보이는데다 우리 집 그이가 좋아하는 연한 밤색이네. 여동생 아니랄까봐 좋아하는 색깔도 제대루 맞췄네유” 막내 시누이가 부부동반 유럽여행을 15일간 다녀오면서 민자씨 내외 선물까지 사 온 거였다. 시집올 때 여중 2년생이던 시누이가 어느새 중년이 되어 때로는 서로 마음의 위로도 되어주면서 같이 늙어가고 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시집와서 몇 년간은 성질 못되먹은 시누이 때문에 마음 고생도 적지 않았었다. 하얀 하복 벗어 놓은 거 하이타이에 담갔다가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까지 해주면 목에 때가 않지워졌느니 주름이 두개여야 하는데 세개가 됐다고 하질 않나. 도시락 반찬은 허구헌날 계란말이냐며 어떤 날은 도시락을 내팽개치고 가질 않나. 하여튼 막내 시누이 챙기기가 시어머니 챙기기 보다 더 힘들었던 사람이 바로 민자씨였다. 그러던 철부지가 어느새 이렇듯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오빠내외 선물도 사오고 대접을 해주니 민자씨는 마음이 흐믓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막내 시누이가 똑똑하고 대단한 여자다. 그 당시 시골에서 여자들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대학에 들어가 외국회사 다니는 능력있는 남편 만나 시집 잘 갔지. 게다가 자기도 반공무원인 국영기업에 들어가 지금 나이가 40후반인데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여자로서는 꽤 성공한 셈이다. 그나저나 유럽은 커녕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한번 못 가본 처지니 도대체 뭐때문에 그렇게 유럽여행을 가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고모. 뭐 볼 것은 많어유. 나는 가보질 않았으니 뭐가 좋은 줄 알아야지” 사실 최근 들어 젊은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여자들 계에서도 유럽여행을 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민자씨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니 대체 유럽이 어떤 나라들이길래 그렇게들 관광을 떠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아이구 언니 말해 뭐해요. 어찌됐든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스위스 뭐 이런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구요. 역사 깊은 도시들이 많은 만큼 볼거리들이 많아요. 로마시대 유적들이 곳곳에 깔려 있고 미술관, 박물관들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거기 어디야. 맞아 ‘프라도미술관’ 이라는 데가 있어요. 그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건데요. 어머 전시실이 100개가 넘는다니까요. 시대별로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해놓고 있는데 이건 뭐 제대로 보려면 하루 가지고도 모자란다니까요. 그 전시실들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다 둘러보는데 반나절은 족히 걸리더라구요. 유럽사람들 자존심이 강한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우리나라 역사 유적지는 걔네들에 비하면 너무 형편없이 보존되고 있는 거라구요. 정말 깨진 기와 한조각도 얼마나 소중하게 잘 모셔 놓았는지.....,” 워낙 말을 잘하는 시누이라서 그런지 일단 한번 입이 열리면 뭐든지 술술술 실타래 풀리듯 말이 나왔다. “아이구, 고모 말하는 건 그냥 여행 가이드가 말하는 것보다 더 시원하게 풀어놓는다니까. 미술관, 박물관 많다고 하니까 관심이 가네유. 사실 나도 미술은 좋아했었는데” “그래요. 그러면 언제 한번 오빠하구 맘먹고 다녀와요. 거기는 사실 거리나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고 미술관인 곳이 너무 많아요. 이를테면 생활자체가 중세시대 건축물 속에서 그대로 지속되니까요. 뭐 조금 고장 났다고 해서 다 뜯어 헤치고 새로 만들고 하는 일은 없어요. 시내 중심가를 가도 몇 백 년 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구 2천년 넘은 문화재가 그대로 보관돼 있으니까요. 글쎄 ‘똘레도’인가, ‘세고비아’인가. 그 도시는요. 크지는 않지만 도시자체가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로 유네스코에 등록이 돼 있다고 하더라구요.” “고모 말 듣고나니 나도 정말 가고 싶네유. 맞어유. 뭐든지 갖고 있는 거 오랫동안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좀 부족해유. 사람이든 기술이든 돈이든 역사든간에 남보다 좀 우수하면 잘 간수를 해야하는데 ....,” “그럼요. 있는 것 잘 가꾸고 유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거라구요.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 섬세하고 재주 많은 거 다 좋지만 관리를 잘 못한다니까요. 그런거는 정말 유럽사람들한테 한 수 배워야 된다니까요. 어찌됐든 둘째 장가 보내거든 해외 한번 갔다와요.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구 맨날 시골에서 일만 하다 그렇게 늙어 갈수는 없잖아요.” “그런말 말어유. 큰 애 결혼한 지 이제 2년 밖에 더 되었어유. 작은애도 보내야되구. 그 애들 집사서 살 때까지는 늘 걱정이지유.” “아이구 언니는 무슨 집까지 사줄 작정이요. 집은 지들이 알아서 사든지 말던지 하라고 해요. 부모가 무슨 죄가 있어서 결혼시키고 난 다음에도 돈을 대줘요. 난 언니하고 생각 달라요. 그럴 맘 조금도 없어요. 아이구 시간이 너무 늦었네. 내일 출근하려면 빨리 올라가야 겠네요” 시누이가 올라가고 난 다음 민자씨는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었다. 아이들을 챙기자니 자신만 늙어가는 것 같구. 그렇다고 부모가 되어서 나 몰라라 하면서 두 노인네만 넉넉하게 산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같았다. 어찌 되었든간에 한번 뿐인 인생인데 좀 즐겁고 알차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저녁이 되자 남편이 들어오더니 지난번에 바르고 남은 염색약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사실 남은 염색약은 민자씨가 자기 머리 염색하는데 썼기에 남아 있지가 않았다. 유난히 자기 것을 누가 쓰면 싫어하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아는 민자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아이구 아까 고모도 그러대유. 이제는 염색하지 말라구. 저기 뭐여 유럽사람들은 염색약이 노화를 부추기고 몸에 않좋다고 아예 쓰지를 않는다고 우리한테 염색 하지말라구 하대유. 뭐든지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좋대유. 당신도 이젠 그냥 흰머리 나오는대로 내버려둬유. 유럽 사람들은 조상들 문화유산도 있는 그대로 잘 지켜서 지금은 관광수입만도 엄청나다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있는 것도 제대로 관리를 못한다는 말이 맞긴 맞어유. 아이구 나도 이참부터 염색 안할래유. 해야 며칠 지나면 또 흰머리 나오는 걸 뭐. 자연 그대로 두는게 좋지” 거짓말이긴 하지만 염색약이 건강에 해롭다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니 문제될 것 없다는 게 민자씨 생각이었다. 그러자 남편은 갑자기 별스러운 말을 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참 나, 이젠 별 소리를 다 듣네. 아니 몇 년을 해온 염색을 갑자기 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여. 변한 건 자네 마음 같네 그려. 갑자기 또 유럽은 왜 들먹거려” “아 그 뭐여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말이 생각할수록 맞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유. 사실 흰머리도 잘만 관리하면 멋지던대유 뭘. 그리구 또 있시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민자씨 남편은 화가 난 듯이 쳐다보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여러말 말구 내일 읍내 나가면 염색약이나 사다 놓으라구. 참 또 뭐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겨.” 그러자 민자씨 말을 했는데 남편이 갑자기 껄걸 웃으면서 민자씨에게 치매 아니냐고 묻더란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랬을까. 남사스러워 말 못하겠다는 민자씨를 살살 구슬러 들어본 그 얘기는 바로 이거 였다. “당신이 날 사랑해주는 맘, 내가 당신 사랑하는 맘이지 뭐 있겄시유.” 필자연락처 :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