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 사정 홀아비가 알아 준다’ “내 배 다 부른 다음, 남 챙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배고픈 사람 심정은 배 고파보았거나 아직도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잘 헤아린다구. 연말 불우이웃돕기를 봐도 그래. 없는 사람들이 한 두푼 이라도 더 열성적으로 내지, 있는 놈들은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못하다구. 설령 이웃돕기 성금을 낸다하더라도 자기 회사 홍보나 스스로 방송 타려고 내는 인간들이지. 그러니 옛말에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알아 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참 크는 애들이 먹을 것 못 먹어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에구 참으로 애석한 일이구먼” 민자씨는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협회홈페이지에서 ‘통일우유보내기성금접수현황’을 본 민자씨는 자신도 아직 성금을 내지는 못했지만 북한 청소년들의 키가 남한 청소년들에 비해 턱없이 작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북한의 아이들을 생각하자니 한편으로는 다섯살 때 6.25 전쟁을 맞이한 후 어린시절을 힘겹게 버티어 낸 세대인 자신의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갔다 오면 들로 일하러간 부모님을 대신해 허구헌날 저녁을 준비해야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쌀이 풍족하지 않았으니 감자 씻어서 보리쌀 한줌 넣고 밥을 하면 이건 감자가 절반이 넘는 감자밥이었다. 하루는 감자밥이 질려 감자 대신 쌀을 한주먹 넣고 밥을 했다가 엄마한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그날 민자씨 엄마는 나뭇가지를 꺾어 몇대 때린 후 저녁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식구들이 잠들 무렵 마루에 앉아 혼자말로 이렇게 하소연했다. “저 어린 것이 뭔 죄가 있다구. 날마다 감자 밥 먹기가 얼마나 싫었으면 단지라는 단지는 다 뒤져서 쌀을 찾아냈을까. 에구. 내가 몹쓸 년이지. 자식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 잠을 자지 않고 눈만 감은 체 누어있던 그녀는 엄마가 혼자말로 하는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엄마의 넋두리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래 쌀을 꺼내다 밥을 한 자신이 미워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다. 어린시절 가난 때문에 가슴아파했던 기억들을 회상하자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평생을 농사지으며 5남매 키우느라 고생만하다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가슴을 짖눌렀다. 읍네에 장을 보러가도 그 싼 메밀묵 한 그릇을 사 드시지 않던 엄마였다. “에구 복도 없지 노인네.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만하다가 막내 아들 결혼시키더니 일년도 못 지나서 곧장 당신 할일 다했다며 매정하게 떠나가 그래. 에구 성질나 진짜. 남들은 80넘어서도 꽃단장하고 여기저기 나들이 다니는구먼. 일흔 셋에 뭐가 그렇게 급하다구 떠나는 겨” 가을 오후 햇살은 제법 따가운 기세로 거실현관으로 들어와 비추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측은함, 서글픔, 그리움 그런것들로 뭉쳐져 멍하니 먼 산 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청승맞은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콩 밭 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 무슨 사연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엔 울어주던 산새소리가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얼마나 자기 감정에 빠져있었던 걸까. 읍네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와 축사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 조차 전혀 모른체 넋 나간 여자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남편의 헛 기침 소리에 그만 정신이 바짝 났다. 그제서야 남편이 만기적금을 타러 축협에 갔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술도 안 마시는 양반이 왜 이렇게 늦었대유. 이자는 많이 붙었시유”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뭔놈의 이자 많이 붙겄어. 돈 뻥튀기하려면 서울 가서 집을 사야지. 몇푼 안되는 적금으로 돈 벌겄어.” 지난해부터 사업을 시작한 큰아들이 요즘 경기가 나빠서 수금이 안되는 통에 돈이 쪼들린다는 얘기를 듣고 다만 천만원이라도 보태주려고 5년 만기된 적금을 탄 것이었다. 한달에 15만원씩 처음에는 남편 모르게 이것저것 아껴 붓다가 그만 연말에 축협에서 적금 고객들에게 보내온 사은품 때문에 2년도 못가서 들통이 난 적금이었다. “천 만원 돼야 하는디 그것도 안되나유. 어차피 도와 줄 거면 천 만원은 보내야 하는디. 설마 일 이십 만원 보태면 그 돈은 되지유” 순간 민자씨 남편은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 거시기 그 뭐여 천만원은 안되는디. 거기다 그 뭐여.”남편의 어눌한 말투에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민자씨는 따지듯이 물었다. “아 얼마나 되는데 그래유. 숨겨둔 첩한테 한몫 떼어 줬시유. 왜 그렇게 말을 더듬고 그래유” 그제서야 남편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듯 조금은 긴장한 듯 말을 이어갔다. “저기 원금 이자 합쳐서 구백칠십만원여. 거기서 세금 떼니까 구백오십육만원이더구먼. 그런디 말여 다시 거기서 십육만원 떼니까 구백사십만원이 됐구먼. 그 돈에서 난 우동 한 그릇 안사먹었다구.” 그렇다면 대체 16만원은 어디로 갔다는 것인가. 민자씨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진 돈도 돈이지만 16만원의 출처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남편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 “저 양반이. 아 십육만원은 어디로 갔냐구유. 왜 그건 말을 안하냐구유. 필요한데가 있어서 썼으면 썼다구 말을 하던지. 에구 내 속이 터져. 아니 가뜩이나 모자라는 돈을 또 어딨다 쓴거여 도대체” 민자씨 성질을 내자 이번에는 남편도 화가 난 듯 큰 목소리를 맞섰다. “저 여편네가 돈에 눈이 멀었나. 지금 누구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난리여. 돈 십육만원 때문에 지금 날 가르치자는 거여. 아니면 무시하는 거여. 여자가 어쩌면 그렇게 돈을 밝히는 지. 내 참 살다 살다 별일 다 본 다니까” 이쯤 되면 부부싸움은 막이 오른 것이다. 민자씨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려유. 난 돈에 환장한 여자유. 왜 내가 뭘 잘못했다구 그려. 난 죄가 있다면 한푼 두푼 아끼며 살아온 것밖엔 없시유.. 그런데 어따대구 돈을 밝힌다구 말하는 겨. 참 헤픈 여편네들하구 살아봐야지 그때서야 나 같은 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겄지. 글구 대체 그 십 육 만원은 어디 갔다 삶아 먹었길래 말을 못하는 겨. 우습네 정말” 하지만 민자씨. 이번에는 공격 실패였다. 그것도 한마디 반박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실수였다. 남편은 말했다. “그래 십 육 만원을 어디에 썼느냐면 통일우유보내기 성금으로 냈다. 어쩔것이여. 오늘 마침 읍내서 연합회 임원들 회의가 있었구먼. 연합회장은 삼십만원 내구 나머지 임원들도 십만원, 십오만원 내는데 나라구 몇 만원 달랑 낼수는 없는 일이잖어. 우리만 배터지게 잘먹구 잘살면 뭐혀. 한 동포인디. 거기 애들도 잘 먹고 잘 크게 도와줘야지. 이젠 됐어. 속시원하냐구. 이 여편네야 ”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민자씨는 권투글로브로 머리를 두들겨 맞아 멍해진 것처럼 한마디로 바보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할말도 없었다. 십육만원은 나름대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쓰여졌고 그것은 민자씨 또한 원했던 일이니 남편에게 오히려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필자연락처 :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