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 하 세 요’ “아이구 당신도 살 좀 빼야 되겄시유. 해가 갈수록 배가 나오는 구먼. 나이 들수록 살찌면 위험하다던데” “허 참나. 사돈 남 말 하시구려. 자네 배도 만만찮으니 거울이나 좀 보시지. 자기는 뭐 아직도 몸매가 아가씨인줄 아나보지.” 민자씨 아침 밥을 먹으면서 갑자기 남편의 뱃살을 얘기한 건 실수인지 아니면 잘 한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뱃살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남편의 한마디에 민자씨 핵폭탄을 맞은 듯 그야말로 졸도할 지경이 된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이런 식으로 말을 받아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얼래. 저 양반 말하는 것 좀 봐. 아니 왜 갑자기 남의 몸매를 가지구 난리셔. 당신 살이 늘어난 건 맞잖아유. 뭔 남자가 살쪘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 마누라 몸매 타령이랴. 아이구 참 나. 별일 다 보고 살아 내가. 저렇게 좀스러운 사람하고 여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네” 남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평소의 남편은 민자씨의 잔소리 쯤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왜 내가 말 잘 못했나. 살이 좀 찐 것은 나도 안다구유, 그런데 당신도 별수 없다니까. 왜 자기 살 찐 것은 모르고 남의 살찐 것 흉을 봐. 요즘 젊은애들 사이에 그 뭐시여. 영화 ‘친절한 금자씨’ 때문에 이런 말이 유행 한다더군. ‘ 너나 잘하세요’” 평소 말수가 없는 남편이었지만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한 듯 싶었다. 이런 남편을 쳐다보면서 민자씨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생각 같아서는 밥 숟가락을 남편의 입으로 던져주고 싶을 정도였다. 밥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할말을 하는지 모르겄네유. 그려유. 밥이나 배 터지게 많이 먹어유” 불같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문을 후려치듯 소리나게 닫고는 옆집 형식이네로 달려갔다. 화가 난 아줌마들은 누구든지 붙잡고 수다를 떨어야 직성이 풀리는 법. 부지런한 형식이 아버지는 벌써 약초밭으로 일을 하러 나갔는지 형식 엄마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침에 여자가 남의 집 가는 것은 아니라는 미신을 귀에 따갑도록 듣고 살았던 그녀인지라 여간해서는 이른 아침에 남의 집을 가는 일이 없었지만 너무나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형식이네로 향한 것이다. 발을 들여놓고 나니 아차 싶었다. “아이구 미안혀. 아침부터 여자가 남의 집 드나드는 것 아닌데” “아줌니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별 말을 다 해유. 그나저나 어쩐 일 이셔유. 아침은 잡수셨어유” “아이구 말마. 나 지금 심정 같아서는 보따리 싸구 싶다니까. 아 별놈의 영감탱이야. 참 기가 막혀서 내가” “영감탱이라니, 누가 왔어유?” “아이구 누군 누구야. 우리 집 영감탱이지” 형식 엄마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민자씨가 남편을 말할 때는 ‘우리 그이’ 라고 말했으니 갑작스러운 ‘영감탱이’라는 표현이 낯설을 수밖에 없는 일. “아이구 아줌니도. 아저씨 보구 갑자기 영감탱이라고 하니 대체 뭔 일 있었시유. 화가 잔뜩 나신 것 같네유” 민자씨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 전 밥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마치 어린애들이 일러바치듯이 낱낱이 플어놓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참을 수 없는 인격모독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난 형식 엄마의 말은 의외였다. “아이구 아줌니도 잘못하셨네유. 우리 형식아빠도 뱃살 쪘다고 하면 얼마나 싫어하는데유. 요즘은 웰빙시대라서 남자들이 살에 더 예민하다니까유. 아저씨도 화가 나셨나봐요. 그냥 참으셔유. 손자까지 보신 분들이 뱃살 좀 있으면 어때유. 아픈데 없이 건강하시기만 하면 되지유” 형식엄마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자신을 늘 젊고 예뻐 보인다며 추켜 세워주던 남편이 갑자기 ‘너나 잘하세요’라며 비아냥거린 것을 생각하면 모욕을 당한 것 같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거울 앞에 선 모습은 민자씨 자신이 아닌 듯 싶었다. 영락없는 아줌마 파마에 얼굴은 검게 타 있었고 팔이나 다리는 흉하게 살찐 구석이 없었지만 아랫배만큼은 확실하게 불룩 튀어나온 게 아닌가? 평소 치마를 즐겨 입는지라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가 이처럼 많이 나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형식 엄마가 자신의 옆으로 걸어오더니 나란히 서서 거울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한 여자는 젊고 날씬하며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면서 30대 후반의 여성의 미를 발산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여자는 쳐진 가슴에 똥배가 튀어나온 영락없는 시골 아줌마 그 자체였다. 그런데 더 그녀를 속 쓰리게 하는 것은 영식엄마의 말이었다. “저도 요즘 살이 좀 찌는 것 같아요. 읍네 여자들 에어로빅이 유행이라던데 이 참에 나도 그거나 할까” 민자씨 귀에는 마치 자신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처럼 놀리는 듯한 말로 들려왔다. “어머 형식엄마 너무 한다. 그럼 나는 뭐야. 자기가 살이 쪘다면 나는 돼지라는 거야. 정말 화난다. 자기는 가슴도 풍만하고 탄탄하면서 .....” 여자의 질투 그것이 쉰 일곱 민자씨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민자씨의 말에 무안해진 영식엄마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머 아줌니 그런 뜻 아니에요. 저도 속살은 좀 쪘거든요. 어휴 마음 푸세요. 아직은 아줌니도 연세에 비하면 몸매 좋으신 거예요. 우리 친정엄마는 70키로 넘게 나간다니까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한다더니 마치 자신이 그런 것 같아서 민자씨는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일이 벌어진 만큼 자신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녀는 읍내로 에어로빅을 하러 다니자고 영식엄마를 꼬셨다. 그날 오후 두 여자는 읍내로 나가 에어로빅 수강을 접수하고는 에어로빅에 필요한 옷까지 샀다. 민자씨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 에어로빅 강사의 말처럼 세 달만에 아랫 뱃살을 뺄 것이며 뚱뚱보 남편이 절대 자신의 몸을 털끝 하나도 만지지 못하도록 하여 애를 태워보겠다는 작정을 했다. 이튿날 오후 읍내 찜질방 헬스클럽에서 첫 연습을 하게 된 두 여자. 음악에 맞춰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손을 올리고 내리고 히프를 좌우로 돌리고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형식엄마는 젊어서 그런지 대충 따라가는 눈치였지만 민자씨는 실수투성이였다. 모든 동작이 생각대로 빨리 되질 않았다. 뒤로 돌면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돌고 있고 우측으로 발을 뻗으면 옆 사람은 좌측으로 발을 뻗고 있었다. “자, 자 옆으로 뒤로 한바퀴 돌고 손뼉 세번. 거기 큰 언니 손뼉 한번 더 치시네. 자 자 절보고 따라하세요. 팔을 들어 귀에 붙이고 .....” 20대 후반의 에어로빅 강사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민자씨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순간 순간 놀라는가 하면 늘씬한 키와 몸매에 얼굴까지 예쁜 강사가 볼수록 마냥 부럽기만 했다. 한 시간 가까이 온몸을 흔들어대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자 느낌 같아서는 살이 몇 키로 빠진 것만 같았다. 헬스클럽을 나오자 몸이 한결 가벼운 듯 해 기분이 좋아지려는데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는 운동하는 동안 수없이 틀린 자신의 동작을 누가 보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이 40여명이나 되니 누가 누군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행여나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흉을 보고도 남을 일이었다. 더욱이 동갑계원들이 열명이 넘으니 그 중 누구하나라도 있었다면 다음 곗날 웃음거리가 될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목장댁’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마치 도둑질을 하고 나오다 주인에게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수다스러워서 남 얘기하길 좋아하는 미장원집 여자였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미장원 집 여자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 “어머 자기는 언제부터 에어로빅 나온 거야. 오늘 처음 보네. 난 아까 연습할 때 자기 봤다구. 그런데 자기는 날 모른척하더라. 그래도 우리 동갑계원 중에는 우리 둘 뿐인데. 첫날은 좀 서툴지만 하다보면 잘 될 거야. 나는 오늘이 벌써 20일 째라구. 한 일주일 하다보면 동작이 몸에 익더라구. 어머 그런데 생각보다 아랫배가 많이 나왔더라. 에어로빅 시작하길 잘 했네.” 아랫배 얘기만 안했어도 민자씨 그냥 웃는 얼굴로 답하려고 했는데 말투 얄밉기로 소문난 미장원집 여자는 결국 일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민자씨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말이라도 한마디 시원하게 쏘아붙여야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내뱉듯이 쏘아버린 말은 간단했다. “그런 자기 뱃살도 만만치 않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할테니 너나 잘하세요’” 이 말에 입이 떡 벌어진 미장원집 여자를 뒤로 하고 운전석에 앉은 민자씨, 형식 엄마가 조수석에 앉아 통쾌하다는 듯 시동을 부르릉 걸고 집으로 향해 달렸다. 필자연락처 :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