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아녀, 이 추잡스런 세상 탓여”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흙이나 한줌의 재로 남지만 정신 즉 영혼은 살아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당과 지옥 둘중 하나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천당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살아 생전에 남에게 베풀고 선하게 살았다면 천당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천당에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일곱번의 심사를 받아서 통과가 되어야 하거든요. 때문에 몸은 죽었지만 영혼이 천당에 가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길 기도 하는 것이 바로 49제라고 합니다. 일곱 번의 심사를 무사히 잘 통과하게 해달라고 일주일에 한번씩 일곱 번의 제사를 올리며 기도하는 겁니다.” 사촌언니의 남편 그러니까 친정 사촌 형부의 49제가 끝나는 탈상에 참석했던 민자씨는 50넘은 나이에도 참으로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스님이 이런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49제란 그저 죽은 영혼을 위해 가족들이 3년상을 대신해 추모하는 것 쯤으로 생각했을 뿐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특별히 종교가 없는 그녀로서는 가끔씩 특별한 계기가 있으면 절에 가 보았을뿐 불교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던 터였다. 49제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 의해 생겨났고 죽으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알았다. 불교대학을 졸업했다는 스님의 말을 들으면서 민자씨는 다시 자신을 돌아다보게 되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느꼈고 사람이 죽는다해서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2월이 가고 3월이 시작되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그녀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스님의 말처럼 천당에 가서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살것인가. 아니면 뉴스에 나온 누구처럼 고3짜리 손자 과외비로 1억을 내놓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평소에 누구 도울 일이 있으면 늘 앞장서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남들에게 자신있게 말할만큼 엄청나게 많은 선행을 베푼것도 아니었고 그렇다해서 손자들 자식들에게 1억씩 내어줄 만큼 많은 돈도 없는 게 자신의 현실이었다. 마음이 착찹했다. 남들은 몇 십억 몇 백억 부자가 될 때 무엇을 했는가 싶기도 하고 테레사수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은 이들에게 학문적 도움을 주지도 못했으니 어찌보면 별 수 없는 인생 살았다는 자책감에 빠지면서 알 수 없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며칠을 그렇게 정신적 공황속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주변사람들은 사람이 달라졌다면서 무슨일이 생긴것이냐는 걱정의 전화를 걸어왔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수퍼댁은 눈치가 빨랐다. “아니 요즘 왜 그런거여. 인생 다 산 것 같네. 아 겨울 가고 봄이 왔는데도 목소리는 힘이 없구 요즘은 읍네도 통나오질 않으니 뭔일 생긴 것 같구먼. 내가 보기에는 갱년기 우울증 같어. 접때 49제 지내고 온 후로 정말 이상해졌다니까” 여동생은 한 핏줄이라 하지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그녀의 속을 헤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머 워째 언니는 요즘 전화도 없어. 형부하고 제2의 청춘기라도 시작됐수. 언제 시간되면 한번 올라와. 언니 좋아하는 핑크색으로 투피스 한번 사줄테니까” 며느리 역시 서른 살 넘게 차이가 나는 시어머니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님 어디 불편한데는 없으시죠. 그런데 목소리는 어디 편찮으신 것같이 들려요. 주말에 저희가 내려갈까요. 아니면 어머니 목장 일 바빠지기 전에 온천 같은데라도 한번 다녀오실래요. 생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올해 쉰 일곱. 내일 모레면 환갑을 내다보는 나이에 인생을 잘 못살아왔다고 한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고 남은 인생을 어찌 살아야 좋을지 모르는 갑갑한 심정이야말로 그녀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수 없는 것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형제들도 어찌보면 다 저마다의 삶을 사는 것이니 민자씨 자신도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반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는 일. 이때 걸려온 또다른 한 통의 전화는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기 시작했다. “오민자여사님 이시죠. 안녕하세요. 저희는 결식아동들의 식생활과 청소년 가장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봉사단체 ‘한사랑’이라는 곳입니다. 오 여사님 00여고 나오셨지요. 그러니까 여사님 후배들 중에서 학비나 생활비가 없어서 어려운 친구들이 여럿있습니다. 이제 자제분들 다 커서 결혼 시키셨을테고 생활에 크게 힘든 것 없으신걸로 아는데 오여사님 이번 기회에 후배들에게 좋은 일좀 해주세요. 뭐 단돈 천원 이상이면 얼마를 후원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여사님 정도 되시면 서너명 후원은 충분히 하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참 오여사님 아니 선배님 알고 봤더니 여고시절에 학생회 활동도 하셨더라구요. 저도 거기 출신인데 그렇다면 더더욱 후배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조해주셔야죠.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에게도 지원을 하는 판에 후배들 지원이라면 얼마나 의미있고 뜻있는 일 이겠어요.” 25회 졸업생이라는 여자의 차분하면서도 설득력있는 목소리는 민자씨로 하여금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끔 만들었다. 또 민자씨 역시 듣고 보니 그리 피할 일만은 아니었다. 모교 후배들을 후원하는 일이니 의미도 있고 연말에는 동문회 행사를 통해 후원한 후배들도 만나게 된다고 했다. 게다가 큰 관심은 없지만 학교 후원회의 임원으로 임명한다는 게 아닌가. 여자는 통장번호를 불러주면서 후원 학생 1명당 50만원이니 두명이면 100만원이라고 알려주면서 한번에 다 입금시키기 힘들면 두어차례 나누어서 입금을 시켜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무실 연락처를 남겼다.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민자씨는 이런 계기를 통해 자신도 집 밖의 세상속으로 한걸음 나가고 의미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한번 마음 먹었다면 일을 과감하게 저지르는 스타일인 민자씨. 그녀는 그날 곧장 읍네로 나가 은행에서 여자가 알려준 통장 번호로 100만원을 계좌이체 시켰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자식도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통장이 하나 있었다. 천원 이천원씩 돈이 생길때마다 모아두었던 자그마치 20년이 넘은 통장이었다. 시간이 흐른 것에 비해 통장의 돈은 많지 않았지만 통장에는 7백만원 가까이 되는 비자금이 있었고 이 돈은 목장을 그만두고 쉬게 되는 날 남편하고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올 생각으로 모아온 터였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하라 ’고 했던가. 민자씨는 그 누구에게도 이런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 마음 하나 편하고 뿌듯하면 그것으로 됐다는 생각을 했다. 한동안 침울해 있던 아내의 얼굴색이 달라진 것을 보면서 며칠동안 마누라 눈치만 살피고 있던 남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읍네 가서 애인을 만나고 왔나. 얼굴이 달덩이가 됐구먼” 나이 들어서도 마누라 비위를 맞춰주느라 애쓰는 남편이 한편으로 고맙기만 했다. 하지만 늘 그 고마움의 표현은 쌩뚱맞았다. “할머니 주제에 무슨 애인이 있수. 이렇게 늙어갈 거라면 진작 만들어 놓을걸 그랬시유. 어째 나이들어 엉뚱한 소리만 하셔유.” 그러자 남편은 한 수 더 떴다. “아이구 그런 말 말어. 어느나라 에선가는 60대 할머니가 애도 낳았다구 하더구만. 당신같이 젊고 예뻐보이는 여자들은 보기 힘들다니까 . 허허허” “아이구 빨리 씻구 저녁이나 먹어유. 누가 들을까봐 무섭네유” 그렇게 그날 저녁부터 민자씨는 다시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내놓은 후원금으로 자식같은 후배 두명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게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고3때 학교 회장이었던 동창생 경희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참으로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글쎄 몇일 전에 후배들을 위해 후원금 좀 내달라고 해서 50만원 보냈는데 알고봤더니 이것들이 사기꾼들이더라니까. 글쎄 우리 2년 선배 언니한테도 전화가 왔는데 그 언니는 모른 척했다구 하더라구. 야 오민자. 너 부회장이었으니까 너도 냈지” “그렇지. 백만원” “뭐라구 백만원씩이나… 어머머 기가 막 혀서” 민자씨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학교 이름 자기 이름까지 훤하게 알면서 전화를 했던 여자의 목소리에서 그녀는 사기일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었다. “야, 경희야 설 - 마 그럴라구” 동창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민자 정신차려. 너는 어쩌면 40년 전이나 똑같다.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니” 이건 뒤통수를 얻어 맞은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졸도하기 그 직전이었다. 완벽하게 사기를 당했고 전화 한 통화에 돈 백만원을 날린 것이었다. 민자씨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탄식처럼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려. 내 탓아녀, 세상 탓여, 이 추잡스런 세상 탓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