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됐어! 지집애야. 내가 뭐 점쟁이냐. ” “ 아이구 이렇게 좋은 걸 진작 와 볼걸 그랬네. ” “ 막내 낳구 몸조리한 후로 20년 동안 먹구 사는 게 바뻐서 등 한번 지져보지를 못했다구. ” “ 세상 좋네. 돈만 있으면 다되니. 몸 따뜻하겄다. 먹고 싶은 거 맘대로 사먹을 수 있겄다. 영화까지 보겠다. 별천지가 따로 없네 ” “ 그뿐여. 젊은 남자들 허벅지도 구경하잖여 ” “ 하하하 하하하 ....” 촌 사람 서울 가면 모든 게 다 신기해서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느라 정신없다더니 여자들 한마디씩 거드는 수다가 찜질방 처음 왔다는 걸 신고라도 하는 듯 했다. 두 달 전 읍네에 찜질방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민자씨도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아는 사람들 만날까봐서 선뜻 가질 못했다. 여자들만 가는 곳이라면 이런 저런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남녀노소 다 모이는 곳이니 남편 친구들이나 이웃동네 아는 어른들 앞에서 반바지 하나 입고 있을 용기가 나질 않았었다. 지방은 도시같지 않아서 행동 하나하나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동갑계 계원들 중 수퍼댁이 나서서 마음에 맞는 군청사모님, 지물포 여자, 민자씨 이렇게 넷을 찜질방으로 집합 시킨 것이었다. 따뜻한 물에서 샤워를 하고 나서 옷 갈아입고 미역국에 밥 한 공기씩 말아서 후딱 헤치우고 땀을 빼러 소금방으로 들어간 일행이 조용히 찜질만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60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고 엄마를 따라왔는지 대여섯살된 여자애도 있었지만 이제 질펀하게 수다를 떨어대야 할 시간 아닌가. 수다했다면 지물포 여자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작고 통통한 몸에 말도 어쩌면 그렇게 야무지게 수다를 떠는지 그 여자가 말만 하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 여기도 촌에 지은 것 치고는 잘 져놓았지만 서울은 장난 아니더라구. 지난달에 서울 우리 오빠네 집 갔다가 찜질방을 갔는데 거기는 뭐 엄청 나, 500명이 넘게 들어간다는데. 세상에 나는 호텔인줄 알았다니까. 바닥부터 천장까지 번쩍뻔쩍 빛나서 잘못하면 윗도리 속 젖가슴까지 다 비치겠더라구. 모든 게 으리으리 해. 먹는 것도 없는 게 없어. 말도 마. 아이스크림, 팥죽, 빵, 맥주도 있구. 거기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가 있잖어. 젊은 남자들. 아따 서울 남자들은 워째 그렇게 얼굴도 잘생기고 피부도 하얗던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텔런트 뺨치는 사람들 많더구먼. 언제 시간 나면 우리들도 거기 한번 가자구 ” 남자 얘기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은 그냥 웃고 말았지만 수퍼댁이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 아따 좋았겄네. 그나저나 저쪽에 노인들 있으니까 목소리는 좀 줄여서 말하라구. 워매 서울 남자들 좋지. 이쁘잖여. 그래 눈 맞은 남자는 없었구 ” 민자씨와 군청사모님은 배꼽잡고 웃었고 두 여자는 주거니 받거니 신이 났다. “ 지랄났다. 아, 우리 올케하고 같이 갔는데 어떻게 눈을 맞추냐구. 사실 뭐 솔직히 말하면 한 눈에 탁 들어오는 괜찮은 남자가 있긴 있더구만. 나이는 한 사십 중반 된 것 같은데 안경 쓰고 체격도 좋더라구. 다리에 털두 숭숭 났구. 그 뭐시여 쪼께 지적으로 생겼더구만. 글쎄 말여. 휴게실서 티비를 보는디 그 남자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거든. 아이구 심장 뛰는 소리가 쿵덕쿵덕 했다니깐. 온 몸이 막 떨려오는데 그냥 옆으로 눈길질만 하다 말었지 뭐여. 내가 다섯 살만 젊었어도 꼬리 한번 칠라고 했는디. 열살 연하니 막내 동생 같어서...” “ 아이구. 하여튼 저 여편네 대단하다니까. 근데 거기는 얼마여. 비싸겄지.” 장사꾼 아니랄까봐 역시 수퍼댁은 가격에 민감했다. “ 8천원 하더라구. 2천원 더 비싼 거지. 아이구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하여튼 한번 가볼만한데라니까. 아이구 나는 그날 생각하면 지금도 그냥 가슴이 벌렁벌렁 거린다니까. ” “ 하하하 하 .......” 30분 정도 땀을 냈을까. 여자들은 다시 휴게실로 나갔다.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입이 심심하다면서 먹을 것을 하나씩 사들고 의자에 앉았는데 그때였다. 군청사모님이 민자씨 팔을 흔들었다. “ 얼라. 저 아그 좀 보랑께. 자가 란제리 집 큰딸 아녀. 올해 고등학교 졸업한다는디. ” 민자씨 눈에도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남자애는 한손으로 여자애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여자애 머리를 만져주고 있고 여자애는 남자애 허리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동갑계 계원인 란제리집 딸인 것이었다. 군청사모는 혀를 찻고 수퍼댁도 보았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 저그 어쩌면 좋아. 란제리 집 늦둥이 영선이잖어. 대가리 피도 안마른 것들이 별짓을 다하네. 지들 엄마도 알까. 우리들끼리 몰래 왔으니 찜질방서 봤다고 말도 못하겄구. 참말로 저 애 그렇게 안봤는디. 아이구야. 내일 모레면 국수 먹게 생겼구먼 ” 민자씨도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참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남자를 알아버렸으니 공부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름 전 계 모임 때 란제리 여자가 딸이 대학 떨어져 재수를 시키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공장에 보낼 수도 없어 속상하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의 자식이지만 그냥 보고만 있자니 속이 터졌다. 그렇다고 사람들 많은데 쫓아가서 한마디 할 수도 없는 일이구. 차라리 안보는 게 상책이다 싶어 민자씨는 일행들을 데리고 다시 찜찔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집에서 TV를 보던 민자씨는 낮에 본 란제리 집 딸을 다시 떠올려야만 했다. 찜질방이 청소년 탈선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동갑계원의 딸인데 좋은 말로 달래서 집에 보내고 왔어야 했는데 그냥 모른 척 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자식이야 저 좋아서 하는 짓이지만 부모마음은 썩어 들어간다는 것을 같은 부모입장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란제리집 여자에게 전화를 해줄까 몇 번을 망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울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언니 어쩌면 좋아. 아니 이 지집애가 아침 10시에 나가서 여태 안들어오는거야. ” 여동생은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딸에게 전문대학이라도 들어가라고 했지만 딸은 재수를 하겠다고 해서 싫은 소리를 했더니 아침에 나간 애가 여태 들어오지 않는다며 울먹이고 있었다. “ 한참 예민한 나인데. 앉혀놓고 차분하게 말을 하지 그랬어. 너두 니 성질 좀 고쳐야 돼. 애들을 쥐잡듯 하니 집을 나가지. 아직 아홉시인데 뭐 큰일 있겠냐. 친구들한테 전화 좀 해보구 갈만한 데 있으면 찾아가봐. 그리고 혹시 열두시 넘어도 안들어 오면 니네 동네 가까운 찜질방 같은데 좀 찾아보구. 요즘 학생들이 돈은 없고 추우니까 찜질방을 그렇게 많이 간다더라 ” 그러나 여동생은 급한 성격에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 그 지집애가 찜질방이나 가면 다행이지만 혹시 남자 얘들하구 어울리거나 술이나 처마시면 어떡하지. 지 애비 닮아서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어휴 이놈의 지집애 내 속을 아주 시커멓게 만든다니까. 아니 지 오빠들은 공부도 잘하고 여태 속 한번 안 썩였는데 워째 지집애 하나가 저러는 줄 모르겠네. ” 자식 키워봐야 부모마음 안다고 했다. 사실 민자씨 여동생도 시집가기 전 한때 부모속을 썩인적이 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데다 학력도 낮고 가진 것도 없는 남자에게 빠져 그 사람 아니면 시집을 안 가겠다고 버티는 통에 온 집안 식구들이 속을 썩었던 터였다. 찜질방을 다녀와서 그런지 온몸이 녹은 한 게 잠이 소르르 왔다. 그런데 꿈속에서 그녀는 난리가 났다. 여동생 네 집근처 찜질방에 불이 났는데 그 안에 조카딸이 있다는 거였다. 여동생은 울면서 불길로 뛰어들려고 하고 민자씨는 여동생 팔을 붙잡고 말리고 있었다. 여동생의 몸부림에 화가 난 민자씨 소리를 질렀다. “ 니 맘대로 해 . 죽고 싶으면 들어가. 들어가라구 ” 그러자 여동생은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간 ? 안돼? 하면서 민자씨 절규하듯 소리쳤다. 눈을 떠보니 밤 열한시였다. 남편은 언제 들어왔는지 옆에서 코를 곯며 자고 있었다. 꿈이 너무도 불길해서 민자씨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그녀의 걱정대로 조카딸은 그때까지 연락두절이었고 여동생의 목소리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 민자씨는 꿈이 예사롭지 않아서 여동생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 니네 집 근처 찜질방 있으면 빨리 거기 가봐. 내가 시키는대로 해보라구 ” 30분쯤 지났을까. 전화가 걸려왔다. 조카딸은 민자씨의 꿈대로 찜질방에 있더란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어 민자씨 전화를 끊고 잠을 청하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한시간을 넘게 뒤척이자 잠을 잤는데 해도 안뜬 시간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 언니 고마워. 언니가 살렸어. 어머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오네 ” 여동생은 흥분해 있었다. 숨을 가다듬고 여동생은 말했다. 딸이 있었던 그 찜질방이 새벽에 불이 나서 동네에 난리가 났고 사람이 몇 십 명이 병원차에 실려 갔는지 모를 정도였단다. 그러니 민자씨 때문에 자칫하면 큰 일을 당할뻔 한 딸이 화를 모면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여동생은 엉뚱한 말을 했다. “ 언니 우리 은정이 재수시키면 좋은 학교 갈 수 있을까. 그것도 한번 꿈 좀 꿔줘 . 응.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자씨 웃음이 절로 나왔다. “ 됐어. 지집애야. 내가 뭐 점쟁이냐. 나 참 이젠 별소릴 다 듣네 ” 그 후로 민자씨 조카딸을 위해 좋은 꿈을 꾸어야 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전혀 다른 사람 꿈만 꾸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