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금니 빠지는 줄 알았다구” 병원 문을 나서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민자씨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술과 담배는 해본 적이 없는데 암이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죽기에는 이른 나이여서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도 둘째 아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 평생 젖소 키우면서 일만 해온 남편을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 이었다. 둘째 아들 결혼 시키고 나면 목장 규모는 절반으로 줄이고 집도 새로 지어서 팬션사업을 하면서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읍네로 데리러 나오라고 해야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민자씨의 발걸음은 버스터미널로 향했고 어느새 그녀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있었다. 남편에게 암인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들을 찾아가 말하기는 더욱 못할 짓인 것 같았다. 동갑계원 중 수퍼댁 만큼은 여고 동창생 만큼이나 마음을 터놓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지만 혹시라도 주변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날까봐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하고 싶은 말 쏟아놓기에는 그래도 핏줄 나누고 같은 여자 입장인 여동생이 편했다. 꽃가게를 하는 여동생을 찾아간 시간은 오후 3시. 집에서는 남편이 목 빠지게 기다릴 일이었지만 그녀는 차마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들면 눈물 먼저 나올 것 만 같았다. 여동생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그녀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 할머니가 바람이 났나. 웬일이래유. 점심은 먹었어” 민자씨 애써 어두운 표정을 감추려고 웃어보였다. “그냥 심심혀서 놀러왔구먼. 왜 나는 여기 오면 안되니” 그러나 여동생은 뭔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렇게 놀러 오라고 해도 안 오던 사람이 무슨 일이래. 형부하고 싸웠수. 아님 아들 보러 올라온 김에 동생 생각도 난거유. 여하튼 이상하네. 그나 저나 점심 안먹을 것 같은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구유. 나도 아침을 늦게 먹어서 점심을 안먹었더니 배가 오그라들기 직전이네” 그러나 지금 민자씨 입에 밥이 들어가게 생겼는가? 의사가 꼭 암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했고 뇌시경을 촬영해보자고 했으니 설령 암이 아니더라도 이건 분명 큰 문제가 생긴 게 틀림이 없으니 그녀로서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허무감만 쌓여올 뿐이었다. 민자씨 동생의 말은 귀담아 듣지도 않고 활짝 핀 장미를 보면서 참으로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저 멍하니 꽃만 쳐다보는 민자씨를 보면서 동생은 밖으로 나가려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놓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렸을 때부터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여동생은 뭔가 잡히는 게 있다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민자씨 손을 잡았다. “언니 왜 이래. 빨리 말해봐. 무슨 일이야. 형부가 이혼하자는 말 했을리는 없고 그럼 어디 아픈 거야. 얼굴도 예전 같지 않구먼.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말 좀 해봐. 정말 왜 이러는거야. 언니” 동생은 얼굴색이 바뀌면서 화를 냈다. 어차피 여동생에게는 털어놓으려고 왔으니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몇 분을 그렇게 말없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다가 드디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하는 얘기. 그러니까 며칠동안 입 다물고 있어. 나 오늘 병원에 갔다왔다. 두 어달 전부터 뭘 먹으면 자꾸 체하고 그래서 그냥 속이 않좋은 거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봐. 가슴 밑에 뭐가 뭉쳐있는 것 같고 해서 진찰을 받았더니 의사가 그러더라. 증상으로 봐서는 암 일수도 있지만 일단 뇌시경을 해보자구. 내일모레 다시 오래. 나 어떡하니. 우리 둘째 결혼도 않시켰는데.” 그녀의 말을 들은 동생은 잠시 아무말도 못한 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기 시작했다.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자신인데 동생이 먼저 울어버리니 그녀로서는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말도 안돼. 그건 말도 안된다구. 일단 뇌시경 찍어보면 결과 나올 거야. 아구 정말 미치겠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그날 민자씨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편에게는 동생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하룻밤 묶어간다고 말하고 동생의 차를 타고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겨울 강가에 선 자매는 서로 말이 없었다. 코를 베어 갈 듯한 매서운 강바람은 갑자기 다가온 민자씨의 위기를 더욱 더 아프고 쓰리게 만들었다. 이튿날 아침 집으로 내려간 민자씨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일 암이라면 그것도 치료할 수 없을 정도라면 정말 마지막인데 이런 상황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남편과 아들들에게 각각 유서라도 남겨놓아야 하는 걸까. 56년간 살아온 인생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뇌시경을 해야 하기에 그녀는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저녁도 먹지 않는 그녀를 보는 남편의 불안한 얼굴이 그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고 쓰리게 했다. 당장이라도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착한 남편인가. 남들처럼 여자들 있는 술집 가서 술 한번 마셔 본적이 없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30년이 넘도록 목장만 지켜온 남편이 아닌가?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욕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남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날 밤 민자씨는 잠을 자는 내내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잤다. 피곤해서 코를 곯고 자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또다시 눈물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긴긴 겨울밤을 그녀는 뜬 눈으로 새워야만 했다. 아침에 병원에 가면서 민자씨는 남편에게는 읍네 가서 볼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마침 때맞춰 들어온 우유차를 타고 읍네로 갔다. 병원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불길한 느낌에 휩쌓여 차라리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 입구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어느새 내려왔는지 여동생이 먼저 와서 그녀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언니,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했어. 별일 없을 거야. 겁 먹지 말고 들어가자구유” 동생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들어간 민자씨는 수면 뇌시경이란 걸 받았다.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잠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것처럼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휴게실에서 의사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한 시간은 마치 하루가 걸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 만큼이나 초조해하는 동생 때문에 여유 있는 척 했지만 그건 쉽지가 않았다. 남의 집 물건 도둑질해서 나오는 사람처럼 급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는 그런 시간이었다. 드디어? 오민자씨 들어오세요? 라는 말이 들렸고 그녀는 마치 초등학생이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다 선생님한테 불려 나오는 아이처럼 초긴장으로 발걸음은 뛰는 듯 빨랐고 목소리는 놀란 그 자체였다. 의사의 한마디는 그녀에게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얼굴은 창백해지고 몸은 추위에 떨 듯 떨려왔다.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지나가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그녀를 의사는 눈치 챈 것일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이제는 식사를 하셔도 되구요. 다행이도 종양은 아닙니다. 평소에 활동량이 적으신가요. 살이 뭉쳐있는 것 같습니다. 운동을 조금만 해주시면 됩니다. 잠시 속이 좋지 않았던 것은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순간 민자씨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의사의 손을 꽉 잡은 게 아닌가. 민자씨의 기습적인 행동에 의사는 당황해했다. 그러나 민자씨에게는 의사의 입장같은 것은 생각에도 없었다. “암이 아니라구유. 아이구 선생님 감사해유. 저는 그만 암인 줄 알구......,” 고개를 꾸벅이며 몇 번을 감사하다고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민자씨 그녀는 날아갈 듯 기뻤다. 동생은 간호사를 통해 미리 알았는지 천만다행이라며 밥이나 먹으로 가자고 서둘렀다. 민자씨 못 마시는 술을 마시자고 해도 좋다고 할 만큼 그야말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곧이어 예상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문을 열고 막 나오려는데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 남편, 두 아들, 며느리, 손자, 남동생 등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박수를 쳐주는 게 아닌가. 더욱이 평소에는 감정 표현 한번 못하는 남편이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 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더 감동스러운 것은 남편의 눈물이었다. 그녀를 안은 남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죽음의 길로 가다가 다시 살아온 민자씨. 그날 저녁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고기를 먹으면서 못 마시는 맥주를 연신 들이켰고 그 댓가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 하면서 남편 잠도 못 자게 한 게 아닌가? 이튿날 아침 남편이 하는 말을 듣고 그녀는 미안해서 얼굴만 붉혔단다. 그 말인 즉 “몸도 못 가누면서 밤새 무슨 놈의 뽀뽀는 그렇게 하는지 내 금니 빠지는 줄 알았다구”.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