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도 넘게 날렸대유” 가을 산 단풍은 곱게 물들어가고 기온은 뚝 떨어져 아침 저녁으로는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할 정도가 됐으니 또 한 해를 서서히 마무리 해야하는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보기 흉할 만큼 흰머리가 많은 민자씨는 나이가 들수록 거울을 보면 시간이 빨라도 보통 빠른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흰머리야 어쩔 수없다 치더라도 어찌된 일인지 하루 하루 흘러가는 시간은 마치 모터를 달아놓은 양 정신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디가서 “내 청춘 돌려줘” 할수도 없고 남편에게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다갔수” 하며 짜증을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붙잡아둘 수 없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노라면 세상만사 모든 게 귀찮아지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민자씨 손놀림이 빨라졌다. 젖소들을 돌보는 남편의 일손을 거들어 주다가 주방으로 달려와 아침 상을 차리고 남편이 밥 먹는 사이에 옷을 챙겨입고 간단히 화장도 마쳤다. 남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밥을 먹다 말고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날도 추운데 너무 무리 하지 말어. 적당히 하고 들어와” 생각해주는 남편의 말은 고맙지만 적당히 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게 그녀의 성격아닌가. 일단 뭐든지 했다면 끝장을 보는 그녀로서는 한 번 손에 잡았다하면 자신이 만족스러울 만큼 화끈하게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한달에 여러번 하는 것두 아니구 단 두번인데유 뭘. 아이구 이러다 늦겄네. 점심은 알아서 좀 챙겨두시구유. 나 갔다올래유” 차를 몰고 읍내로 나온 그녀는 수퍼댁을 픽업하기 위해 ‘순자네 수퍼마켓’으로 갔다. 사실 수퍼댁은 매일같이 장사를 해야하는 입장이기에 쉽지않은 선택이었지만 언제나 민자씨 하는 일에는 동참을 하려는 단짝같은 입장을 취해 민자씨로서는 늘 힘이 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오늘 나 때문에 가게 비우는 거 아녀유. 바깥 어른이 나 미워하겠구먼”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을 하고 민자씨를 기다리고 있던 수펴댁은 민자씨의 말에 반색을 했다. “아이구 별 말을 다해유. 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목장댁을 미워하겄시유. 날마다 장사하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인줄 알어유. 이런 일도 있어야지 내두 바람좀 씌고 그러지유” 주책없고 푼수기 많은 미장원 여자가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머 두 분이 어디들 가시는 가봐요. 단풍구경 가시나. 옷도 처녀들처럼 스포티하게 입으셨네.” 그러자 수퍼댁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아이구 참말로. 내가 미장원댁인줄 알어 . 단풍구경은 무슨.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 그럴 시간 있으면 잠을 한 숨 더 자겠네 ” 미장원댁은 참으로 동문서답하는 푼수였다. “어머 그럼 어딜 가시려구요. 혹시 거기 가시려구. 아이구 가지마세요. 글쎄 어제 우리 손님중 두분이 거기 갔다가 지갑에 있은 돈은 물론이고 통장까지 뺏기고 왔다잖아요. 뭐 같은 여자로서 좀 따분하고 그럴 때 한번씩 그러는거 이해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머 잘못하면 집안 망하겠더라구요. 어머 조심들 하세요 ” 민자씨는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수퍼댁은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말이라구 다 말인줄 알어. 자기는 어떻게 우리를 그런 여편네들하구 비교하는 겨. 아니 뭔 할 짓이 없어서 그래 여편네들이 대낮에 그 짓을 하고 돌아다녀. 우리는 그런 인간들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런 걱정은 그 집 손님들한테나 해주더라구” 미장원여자가 가자 그제서야 수퍼댁이 요즘 읍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들려주었다. “나도 처음에는 거짓말인줄 알았다니까유. 세상에 여편네들 간덩이가 부었지. 글쎄 군청 김계장 마누라는 하룻동안 3천만원을 잃었다잖어유. 그러고나서 집에도 않들어가구 어디로 도망을 갔나본데 벌써 열흘째 집에 안들어오구 있다네유. 아이구 그 여자뿐이 아녀요. 거시기 올 봄에 횟집 차렸다가 두달만에 문닫은 쌍둥이 엄마 있잖아유. 글쎄 그 여자는 1억도 넘게 날렸대유. 그 여편네 집 팔구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요즘 통 보이지 않아유. 미친 여편네들 때문에 아주 난리가 아니라니까유. 돈만 잃으면 다행이게유. 어떤 여자는 같이 한 남자들한테 몸도 뺏기구유. 게다가 나쁜 놈들이 남편들한테 말하다고 협박까지해서 남편들 몰래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받아다 주구 뭐 그랬대유 ” 듣고보니 여자들이 화투에 빠져 인생 망치고 있다는 거였다. 서울서 수시로 남자들이 내려와서 국도변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판돈을 벌렸다는 거였다. 참으로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무료한 시간 달래기 위해 고스톱을 쳤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집 날리고 몸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편과 자식까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인가? 민자씨 그녀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도 용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또 듣고보니 미장원 여자가 자신을 그런 여자들로 볼려고 했다는 게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세상에 별 사람 다 봐, 미장원 여자 정말 웃기네유. 아니 자기가 날 얼마나 안다구. 어떻게 우리들을 그런 여편네들과 똑같이 봤대유. 아구 기가막혀.” “저 여편네도 정신 못 차리는 여자유. 지 서방 있는데도 젊은 애들하구 놀러다니구 그러잖아유. 미친년 눈에는 그런거만 보이는 거유. 그나저나 빨리 가지유 뭐” 수퍼댁 말로는 요즘 읍내에서 여자 둘 셋이 함께 움직이면 화투바람 난 걸로 오해받을 만큼 화투 때문에 망가진 주부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화투도 화투지만 서울서 번갈아가며 내려오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30대 초중반의 미끈하게 생긴 놈들로 시골 여자들을 홀리려고 아주 작정을 한 조직적인 도박단이라는 거였다. 민자씨는 수퍼댁을 태우고 읍내를 벗어났다. 동대골 독거 노인 3가구를 돌보기 시작한 게 어느새 일년이 지났다. 한달에 두 번 노인들 찾아 뵙고 밑반찬 몇 가지 만들어 드리고 옷 세탁해주고 청소해주고 하다보면 하루가 꼬박 걸렸다. 팔다리가 쑤셔서 한번 갔다오면 이삼일 몸살을 앓은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민자씨 돌아가신 친정부모 시부모님 생각하면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은 봉사가 아니라 자신의 부모님들께 못다한 효도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갈때마다 노인들은 밭에서 키운 야채를 꼬박꼬박 싸주시기도 했다. 풋고추 한주먹, 감자 한바구니, 못생긴 호방 한덩어리 등등 그곳에는 노인들의 훈훈한 인정이 들어가 있었다. 한참을 달려가고 있는데 수퍼댁은 속이 좋지 않다며 잠시 어디든 내려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침 주유소와 음식점이 함께 있는 대머리 휴게소가 눈에 들어오자 곧장 그곳으로 들어갔다. 수퍼댁은 급하긴 급했는지 정신없이 화장실로 달려가는 뒷 모습이 백미터 달리기 선수를 해도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일인가? 갑자기 경찰차의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읍네 경찰서 차 한대가 민자씨 차옆으로 와서 서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경찰은 곧장 문을 열고 나오더니 민자씨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국도변을 달려오면서 신호 위반한 것도 없는 데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갑자기 당황스러워진 민자씨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실례지만 검문이 있겠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지요. 아 그리고 아주머니 한분이 또 계셨는데 어디가셨지요” 경찰은 그녀가 마치 범인이라도 된 양 날카롭게 주시했다. 민자씨로서는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운전면허증을 건네주자 경찰은 무전기로 번호를 큰소리로 불러대더니 이번에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이지요.” 기가 막혔다. “아니 나 갈데 있어 가는데 아저씨들이 무슨 상관여요. 별일 다 보겄네. 아 언제부터 내나라 내땅에서 자기 가고 싶은 곳 경찰에 다 밝히면서 다녔나유. 참 우스운 사람들이네 ” “아주머니. 저희는 우스운 사람들이 아니고 경찰입니다. 의심나는 게 있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저희는 그럴 자격이 있는데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당황해하십니까? ” 이러다가는 정말이지 범인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때서야 수퍼댁이 화장실에 나와 달려왔다. “어머 차순경님 무슨 일여유” 경찰 중 한사람은 수퍼댁을 잘 아는 눈치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분하고 동행중이세요. ” “그럼유. 나하고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분여요. 거기 있잖아유. 마동목장. 그집 사모님이여유 . 우리가 한달에 두 번씩 동대골에 봉사활동 하러 가는데 오늘이 그날여” 그제서야 경찰들은 표정이 바뀌면서 자신들이 사람을 잘 못 알아보았다는 듯 실례했다면서 고개를 굽신거렸다. 그런데 한 경찰이 하는 말이 민자씨로서는 더 불쾌하게 들렸다. “아이구. 요즘 그거 아시죠. 화투 치러 다니는 아줌마들이 많아서요. 도박단 검거에 나섰거든요. 주로 이런 음식점에서 판을 벌이기에 그만 ....,” 수퍼댁은 경찰들과 잘 아는 사이여서 그런지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려했다. 그러나 민자씨는 너무 기분이 상해 그냥 차에 오르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마디 쏘아 붙였다. “아저씨들 사람 제대로 보고 잡어유. 나는 유, 화투에 ‘화’짜도 모르는 사람이라구. 알았어유. 어디 우리를 그런 쓰레기같은 년들로 보는거예유. 눈 똑바로 쳐다보구 다녀유.” 갑자기 커져버린 민자씨 목소리에 경찰들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필자연락처 :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