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지랄아. 스타킹만 멀쩡했어도.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에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 나이가 5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통기타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민자씨의 기억은 추억 속으로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스물 한 살의 무역회사 경리과 여직원은 늘 대학을 못 간 것이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던 그녀에게 그해 가을, 대학생이 나타났다. 여고동창생 경자의 오빠였는데 친구 소개로 만나 데이트를 서너 번 정도 했을 때 였다. 마침 학교 가을축제가 있으니 초대하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가고 싶었던 대학이었는가. 비록 대학생은 아니지만 대학캠퍼스 축제에 간다는 설렘은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방망이로 두들겼다. 남자는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훤칠한 키에 말수가 적고 천상 남자다웠으니 민자씨의 눈에 80점 이상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친구의 오빠, 여동생의 친구 이런 사이 이고 보니 서로가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오민자씨는 왕십리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남자와 함께 나란히 앉아 연예인들의 공연을 보면서 웃는 모습, 축제가 끝난 후 선술집에 들어가 남자는 술을 마시고 자신은 파전을 먹는 모습이 영화예고편처럼 스쳐지나갔다. 버스를 타고 서너정거장을 갔을 때였다.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안은 후덥지근하고 밀고 밀리는 몸싸움으로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그녀는 축제공연을 보러 간다는 즐거움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앗다. 그런데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청소도구 같은 물건을 든 아저씨가 그녀를 밀치고 버스뒷편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녀의 스타킹을 건드렸고 검은 스타킹은 마치 고속도로를 낸 듯 보기좋게 쭉 갈라져 흰다리 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꿈에 그리던 멋진 데이트 약속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정류장에 내려서 옷가게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약속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스타킹은 찢어졌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도 대학축제에 질게 찢어진 스타킹을 신고 갈수는 없는 일 아닌가? 스타킹을 찢어놓은 남자가 앞에 있다면 귀뺨이라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니 남자에게 연락할 길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에 가서 스타킹 갈아 신고 오려면 족히 두시간은 걸릴 테니 그냥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자와의 만남은 그렇게 빗나갔고 그 후로 미안해서 그 남자에게 연락을 안했고 남자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민자씨가 나오지 않아 한동안 술마시며 방황을 했고 그런 모습을 지켜본 경자는 더욱 화가 나서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가로막았다고 했다. 대학졸업 후 같은 과 후배여자와 결혼을 하여 해외 지사로 발령이나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여자네 집안이 부자인데다 여자가 그 남자를 더 열정적으로 따라다니며 좋아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은근슬쩍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운명이란 그렇게 한순간에 뒤바뀌는 것이고 민자씨에게 그 남자는 그저 씁쓸한 추억 속의 얼굴로 남아 있었다. TV의 출연가수는 이제 여자로 바뀌었다. 나이는 민자씨보다 한 두살 어리지만 연예인이라서 그런지 피부는 탱탱하고 몸매는 아가씨 같았다. 물론 목 주름을 보이지 않으려고 스카프를 하긴 했지만 같은 여자로서 질투가 날 정도로 젊어 보인 게 사실이었다. - 아!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나도 한때는 미인 소리 들었는데. 이 나이에 옛날 생각해서 뭐하겠냐만 그때 그 대학생 남자와 계속 만났더라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대기업전무나 이사의 아내가 되어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서 문화센터나 다니고 백화점 식당코너에 가서 동네여자들과 수다를 떨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지 - 이런 민자씨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저녁 먹기가 무섭게 코를 곯며 잠에 빠져있었다. 나이가 육십 하나 이니 젖소 키우면서 하루 종일 움직이는 것도 이젠 힘이 부칠 터였다. 그래서 곤하게 자는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사람이란 본래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동물이니 민자씨는 다시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지겹게도 그녀를 따라다니던 아래층 회사의 남자였다. 허구 헌날 남자 직원 통해 편지를 보내오고 퇴근시간 맞춰 빌딩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였다. 하지만 민자씨 눈에는 50점도 안되어 보였다. 키는 작고 통통한데다 느끼한 쌍거풀 진 눈은 민자씨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었다. 하지만 지독하게도 눈길 한번 안주었는데 마침 지금의 남편과 선을 보게 되어 그 남자의 구애를 받는 일도 끝이 났던 것이다. 세월 지나 생각해보니 그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것이다. 나이가 들면 가슴도 넓어지는 걸까. 지금 그때의 남자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주 편안하게 먼저 차 한잔 하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설렘이나 미움같은 것은 이미 가슴에서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고 동창생중 오지랖이 넓어 남의 일 다 신경쓰고 다니는 숙희였다. “민자야! 어쩜 좋니. 경자가 죽었단다.” “뭔 소리여. 아니 작년에 서울서 동창들 만났을 때 경자 아들이 출세혀서 미국을 제 집 드나들듯한다구 하던디 ......” “그래 남부러울 것 없었는데 오늘 낮에 교통사고를 당했나봐. 얘 그래도 니가 3학년때 반장였는데 너는 올라와봐야지. 고속터미널 앞에 성수병원 알지? 거기 영안실이야. 내일은 올라와야겠네. 모레가 장례일이니까.” 우연 치고는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평소 생각도 않던 경자 오빠 생각을 잠시동안 한 게 불과 몇분 전인데 경자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으니 민자씨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했다., 이튿날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것은 낮 열두시. 시골 여상이었지만 그래도 정이 많아서인지 동창생들이 꽤 여럿 눈에 띄었다. 조문을 하고 나서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그 순간 한 남자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 했다. 구두를 신다 넘어지려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 잡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는 백발이지만 얼굴은 주름없이 매끈하고 키가 큰 노신사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한 체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40여년 전 대학축제로 그녀를 초대한 경자오빠였던 것이다. 남자도 민자씨의 얼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떼려고 하다가 머뭇거렸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만나면 무덤덤하게 추억 속의 친구처럼 여기고 차 한잔 하자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민자씨는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그 자리를 벗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달아 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더욱 괴롭히는 사건은 그 다음 일이었다. 동창생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데 수다스러운 숙희가 말했다. “ 얘들아, 저기 저 남자 참 근사하지 않니? 경자 오빠잖아. 대기업에서 상무까지 하다가 몇 년전에 퇴직하고 지금은 어느 회사 고문이라나 그렇데. 그런데 세상은 공평한가봐. 나무랄데없이 완벽해 보이는 저 오빠는 10년 전에 상처했잖아. 저 인물이면 재혼하고 싶어하는 여자들 줄을 설텐데.. 그런데 원래 저 오빠가 엄청나게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단다. 놀라운 것은 글쎄 우리 여고 동창생이래. 어떤 년이 그렇게 코가 센지 축제날 초대했는데 안나타나더란다. 아니 저런 오빠를 차다니. 기가 막혀. 더 웃긴 것은 경자년이 끝내 그 비밀을 묻고 죽었잖니. 처음에는 지네 올케가 알면 안된다면서 말을 안하더니 지 올케 죽고 나서도 무슨 큰 비밀이라고 절대 말을 안하더라니까. 죽은 년은 안됐지만 그래도 자식들 잘되어서 그나마 다행여. 내가 과부댁이라면 저 오라버니를 그냥 내 남자로 만들텐데. 어머 그림의 떡이잖아.” 순간 민자씨는 기절을 할것만 같았다. 그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했다니 참으로 믿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혼자 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재혼을 안하고 있다니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그날 민자씨,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날려 보냈다. “아이구 지랄아. 그 스타킹만 멀쩡했어도. 아이구 지랄아, 그 웬수 같은 스타킹만 아니었어도 아이구 내가 미친년여. 스타킹을 벗고서라도 갔더라면......”